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회사원 김모씨. 일찌감치 생명보험에 들었고, 얼마 전에는 유언장까지 작성해 보관해두고 있다.동료들이“걱정도 팔자”라고 핀잔을 줄 때마다 그는 “도처에 지뢰밭(사고 위험요소)인 우리 사회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반박한다.
성수대교와 삼풍 백화점 붕괴, 시랜드 화재 등과 같은 대형 참사를 나만은 용케 피했다고 해서 가슴 쓸어내릴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잦은 안전사고를 겪고서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생활 주변에는 언제든 황당한 사고를 초래할 치명적 요소들이 널려있다. 가히 목숨을 내놓고 사는 꼴이다.
■ 어디에든 안전한 곳은 없다
“차라리 우리 아이가 도로를 무단횡단하다 사고를 당했다면 이토록 억울하지는 않을 겁니다. 멀쩡하게 길을 걷던 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있습니까”
홍모(48·서울 서초구 서초동)씨의 장남(18)은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달 15일 새벽 인근 아파트 앞길에서 가로등에서 흘러나온 고압전류에 감전돼 숨졌다.
홍씨는 “창졸간에 당한 전기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아이가 눈도 채 감지 못했다”며 가슴을 쥐어 뜯었다. 최근 집중호우 와중에서 홍군같은 감전 희생자가 19명이나 나왔다.
사망사고 뿐이 아니다. 서울에 사는 구모(8)군은 얼마 전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면서 손이 톱날 안으로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급하게 접합 수술을 했지만 손가락 하나는 결국 잃고 말았다. 엄마는 아이가 친구들 앞에서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주눅드는 것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서울시 소방방재본부가 펴낸 ‘2000년재난 사례집’을 보면 사고형태와 장소에 예외란 없다. 유형별로는 압도적인 교통사고(86.1%)에 이어 화재(11.9%), 풍수해(1.5%), 철도사고(0.2%), 가스ㆍ지하철사고(0.1%)등 인데다 장소별로는 사무실(57.8%), 산이나 바다(37.7%), 주택ㆍ아파트(36.1%), 차량(24.5%), 공장과 작업장(2.0%) 등 순이다.
소방방재본부 박주경(朴株京) 반장은 “흔히 집안에서는 사고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119구조대가 실제로 가장 많이 출동하는곳이 일반 가정”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지난 주에도 떨어진 구조물로 인해 보행자가 숨지는 사고를 낸 각종 건축 공사장, 곳곳에서 보수가 진행중인 지하철, 섬뜩하게금이 간 아파트, ‘기름 폭탄’을 넣은 지하 주유 탱크, 소방 도로가 없는 재래 시장과 달동네, 어디서 새 나올지 모르는 지하 가스관등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사고에 무감각한 사회
지난해 통계청의 ‘사망원인 통계 결과’에는 우리 국민들의 사망 원인으로 뇌혈관 질환(72.9%), 심장 질환(39.1%)에 이어 각종 사고가3위(26.3%)에 올라있다.
특히 30대 이하의 젊은 층에서는 사고(22.2%)가 단연 1위다.
세계은행 통계에는 사고 사망자수가 인구 10만명당 194명인 우리나라가 엘살바도르(201명)에 이은 세계2위 사고다발국으로 올라있는가하면, 손해보험협회는 우리 나라의 4인 가족이 한해 동안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을 6%로 잡고있다.
이 정도면 ‘죽음의 그림자’가 늘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이렇다보니 웬만한 사고나 사고요인 쯤에는 다들 무감각해 있다. 지난달 서울 관악구 신림동 아파트 공사현장 인근 이면도로에서는 유모차에있던 생후 13개월 여아가 공사장의 15톤 덤프 트럭에 치여 숨졌다.
대형 공사트럭들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곡예하듯 지나다니는데 질린 주민들이 구청에 개선을 요구했다가 묵살당한 직후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러고도 항의하던 주민 대표는 업무방해죄로 경찰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생명 경시풍조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또 지난해 모 가구공장에서는 K씨가 목재 분쇄기에 말려들어가 숨지는 참변이 일어났다. 벨트에 실린 통나무가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지는,보기만해도 섬뜩한 작업장이었지만 제대로 된 안전장치조차 없었다.
이 공장은 보상문제가 끝내고는 정상 가동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면 회사가 보상비용으로 문을 닫고 관계자는 엄중하게 형사처벌 될 사안이다.
최근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방학을 맞은 청소년들이 자주 찾는 수련 시설, 사설 입시학 원이나 독서실 등도 사고 때마다 그렇게 강조됐는데도불구, 여전히 안전 관리가 엉망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 화재 탐지기 미설치, 소화기 미배치, 규격전선 미사용 등….
■ 시민의식부터가 문제다
사고를 단순히 법ㆍ제도의 미비 탓으로 돌릴 것만도 아니다. “생활권 주변을 겹겹히 에워싼 위험을 실감 못하는 심각한 안전 불감증, 또 나만은 비껴가리라는 안이한 생각들이 사고를 키운다“는 것이 소방방재본부 관계자의 말이다.
캐나다에서 최근 귀국한 교포 김모(35)씨는 “보행자가 차도까지 예사로나오는 것을 보면 아찔하다”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 목숨조차도 소중히 여기는것 같지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상사 주재원들은 △청계고가 도로 밑은 다니지 말 것 △대중교통수단은 피할것 △토목ㆍ건축 공사장을 지날 때는 특히 주의할 것 등의‘한국생활 안전수칙’을 교육받는다.
재미 변호사 김형진(金亨珍)씨는 “한국사회는 경쟁이 워낙치열하다보니 모두들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게 사고다발의 가장 큰 원인”이라며 “그러다보니 죽음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길만큼 삶의 품격이현저하게 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OECD에 가입했으면 뭐합니까.사고 방식은 여전히 60년대식의 성장 우선 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정보통신대학원 대학교 이복주(李福柱) 교수의 자조이다.
이민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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