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철도 기행이 화제다. 지난 달 26일 불쑥 전용 열차로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왕복 여행할 것으로 알려지자, 당장 웃긴다는 반응이 많다.요즘 시대에 국가 지도자가 지구 반 바퀴 거리를 무려 24일에 걸쳐 열차로 오간다는 게 도무지 한가로운 것이다.
아버지처럼 비행기를 싫어한다는 상투적 해설에 덧붙여, ‘느림의 철학’ 운운하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권력 안정을 세상에 과시하려 한다는 분석은 점잖은 편이다.
■러시아는 이 여행을 국가 지도자로는 기네스 북감이라고 치켜세웠다. 극동 하바로프스크에서 서쪽 끝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1만km가 넘는 길이니, 굳이 선례를 따질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속내를 제대로 읽는 것이다. 그럴싸한 비행기 기피증은 사실 뚜렷한 근거가 없다.
오직 안전을 위해 한나절 비행 길을 열흘 걸려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적다. 권력이 흔들리는 기미도 없는데, 새삼 안정을 과시한다는 것도 괜한 소리다.
■시베리아 출생 연고를 거론하거나, 무기 공장을 잇달아 시찰할 것이란 보도도 악의 짙은 추측에 불과하다.
그는 김일성 전 주석의 자취가 있는 두 곳을 둘러보고 바이칼 호수를 잠시 구경했을 뿐, 다른 경유지는 그냥 지나쳤다.
두 곳 가운데 비야츠코예는 김 전 주석의 항일 유적지이고, 국경 역 하산은 1988년 러시아 방문을 기념하는 ‘우정의 집’이 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유훈(遺訓) 통치’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철도 여행은 유훈과 자신의 통치 업적을 미리 연결짓는 상징이 아닐까. 김 전 주석은 생전에 남북한 철도와 중국ㆍ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에 큰 기대를 보였다.
김 위원장은 시베리아 장정(長征)으로 부를 만한 강행군으로 이 과업의 당위성과 비전을 북한 인민에게 실감나게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가 한층 적극적인 점을 고려하면, 남북한 모두에 활력소가 될 획기적 결실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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