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은 한 사회가 집적한 지식과 정보의 곳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 백과전서파들이 보여주었듯 계몽과 진보의 거점이다. 어떤 사회가 내놓은 사전의 됨됨이는 그 사회가 성취한 학문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낸다.사전의 편찬은, 언뜻 생각하기와는 달리, 박람강기와 꼼꼼함만이 아니라 논문의 집필 못지 않게 창조성을 요구한다.
특히 일정한 전문 분야의 주제별 사전은 표제어의 해설 하나하나가 소논문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서 집적된 지식을 하나의 체계로 꿰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의 지적 창조성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온 학문 분야별 전문 술어 사전은 대개 외국의 사전을 편역하거나 번역한 것들이었다.
번역이나 편역은 학문 축적의 바탕이다. 그것은 북돋워야 할 일이지 타박할 일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편역자들이나 번역자들이 흔히 정성이나 능력이 부족해, 믿고 기댈만한 사전을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학문의 궁극적 경지는 번역 너머의 창조에 있을 터이므로, 번역되거나 편역된 사전은 결국 하나의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상 연구소가 엮은 ‘우리말 철학 사전1’(지식산업사 발행)은 한국의 철학계가 지적 독립을 모색하는 한 징표로 읽힌다.
이 사전은 박이문 정대현 김상봉 홍윤기씨 등 철학자 열두 사람이 이성 언어 자아 자유 등 철학의 기본적 개념 열두 개에 다소 길게 붙인 해설을 모았다.
우리 사상 연구소는 앞으로 5년간 매해 이런 형식의 사전을 펴내 철학의 기본 개념 60개를 담을 계획이다.
제1권의 서문에 따르면 저자들이 합의한 집필의 대원칙은 ‘우리말로 철학하기, 주체적으로 사유하기’였다고 한다.
더 나아가 서문은 이 사전이 “단순히 서양에서 통용되고 있는 철학 개념의 내용을 소개하는 차원의 사전이기를 지양하고, 이 시대 이 땅에서 살며 고민하는 한국 철학인의 ‘철학함’이 배어 있는 그런 철학 개념들을 담은 살아있는 철학사전이기를 표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출간된 제1권만을 살필 때 이 원칙이 온전히 구현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 사전은 분명히 번역되거나 편역된 것은 아니지만, 표제어들의 선택이나 해설의 방향은 압도적으로 서양 이론의 그늘 아래 있다.
‘자유’ 항목을 맡은 홍윤기씨만이 그 1절을 한국 사회의 자유 의식에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책의 서문은 과대 광고다. 그것은 학문의 독립이 선언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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