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대학에는 컴퓨터를 다루는 침팬지가 있다. 온 세상이 다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데도 아직 컴맹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사뭇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지만, ‘아이’라는 이름의 이 침팬지는 컴퓨터 화면에서 특정한 글자와 그에 배정된 색깔을 구별하여 찾아내는 게임을 한다.올바른 색을 찾을 때마다 상금으로 나오는 동전으로 자동판매기에서 과일을 사먹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는 지금까지 모두 40개의 일본 글자들을 익혔다.
기왕에 자존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아이는 대단히 자존심이 센 침팬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이는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거의 틀리는 법이 없지만, 어쩌다 실수라도 저지르면 우선 주변부터 둘러본다고 한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비교적 쉽게 분을 삭이지만 누군가가 자기의 실수를 목격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이리저리 길길이 날뛰며 주변에 있는 집기들을 집어던진다.
몇 년 전 침팬지 연구의 대가 제인 구돌 박사가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내게 우리나라에 오는 길에 일본에 잠시 들러 아이가 있는 교토대학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침팬지가 있다는 얘기를 오래 전부터 들어왔기에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아프리카 숲 속의 동료들이 긴 나뭇가지를 흰개미 굴속에 집어넣어 그 걸 물어뜯는 흰개미들을 잡아먹거나 돌로 단단한 견과의 껍질을 깨먹는 동안, 대학 연구실에서 컴퓨터를 다루는 법을 배운 천재 침팬지를 꼭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의 높은 자존심과 난폭한 성질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돌 박사는 끝내 아이의 바로 곁에 자리를 잡았다.
먼 곳에서 자기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벽안의 할머니 옆에서 사뭇 신이 난 아이는 거침없이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그러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아이가 한 문제를 틀리고 만 것이다. 얘기들은 대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더니 벽에 붙어 선 자기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는 아이를 보며 구돌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야생 침팬지에 떠밀려 벼랑으로 떨어졌던 기억을 되살리며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잡아먹을 듯이 달려오던 아이가 구돌 박사 바로 앞에서 멈춰 서더니 손을 자기 입에 맞춘 다음 조심스레 그 손을 구돌 박사의 입술에 대더라는 것이다.
연구실 창 밖에서 들여다보던 일본 학자들은 “아이가 아마 당신이 침팬지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라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작년 4월에 아들을 낳았다. ‘아유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꼬마의 재롱이 요즘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아직 너무 어린지라 이렇다 하게 가르친 것도 없는 이 꼬마 침팬지가 엄마의 행동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 어느새 몇 가지 글자들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영장류학자들은 오랫동안 침팬지 부모가 과연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지 아니면 자식이 그냥 보고 배우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이번 발견으로 인해 침팬지들은 절대 자식을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보고 배운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동물이 남을 보고 배운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다. 컴퓨터를 다루고 글을 읽는 정도의 복잡한 행동도 모방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서 처음으로 관찰된 것뿐이다.
북구에 사는 점박이도 요새 암컷들은 번식기에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여러 수컷들 중 누구를 골라야 할지 잘 모를 때면 나이든 언니의 선택을 따른다.
경험이 많은 언니가 고른 수컷이 내가 혼자 애써 고른 수컷보다 나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언니가 그 수컷과 정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도 짝짓기를 한다.
이 같은 모방 행동은 때로 뜻하지 않게 스타를 만들기도 한다. 어느 언니가 선택한 수컷 앞에 많은 어린 암컷들이 길게 줄을 서기도 한다. 마치 우리 사회의 오빠부대처럼.
우리 아이들도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 경험이 많은 어른들의 선택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우리 어른들이 배울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한번쯤 돌이켜볼 일이다. 건너는 길로 건너야 한다는 아이의 말을 무시한 채 아이의 손목을 잡고 차들이 잠시 뜸해진 길을 건넌다.
중학생이라고 말하려는 아이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으며 초등학생 요금을 내기도 한다. 경로석이라며 앉지 않겠다는 아이를 애써 옆에 앉히며 어딘지 불안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침팬지 아이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갈등이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것과 사회에서 다른 어른들이 하는 행동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이제 질서에 관한 교육을 많이 받아 줄을 설 줄 안다. 그런데 부모가 줄을 서질 않는다.
그러고도 별 탈 없이 사는 걸 본다. 차라리 우리 아이들에겐 가르침은 받되 보고 배울 능력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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