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미국 뉴욕에 갔을 적의 일이다. 처음 맨해튼에 간 ‘촌놈’들이 대개 그러하듯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라갔다.옥상에 가니 바람이 차 마침 눈에 들어온 커피판매점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잔 샀다. 후루룩 마시려다 그만 입 천장을 데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뉴욕에 사는 친구와 밥을 먹으려는데 내가 식사를 잘 못하자 친구가 이유를 물었다.내가 설명하자 그 친구는 “최소한 만 달러는 챙길 수 있었는데 안됐다”고 혀를 찼다.
친구 말에 의하면 커피판매원이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세요”라는주의를 주지않았다면 마땅히 배상해야 하고 이미 그 같은 판례는 굳어져서 그냥 “소송을 하겠다”는 의사만 전해도 변호사가 달려와서 “돈을 줄 테니합의하자”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어땠을까. 물론 법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겠으나 뜨거운 커피 때문에입천장을 데었다고 소송을 내면 치료비에다 약간의 위자료, 그나마도 원고의 부주의를 과실상계하면 정말 몇 푼 되지않을 것이다.
지난 97년의KAL기 괌추락 사고 때 사망한 사람의 유족에게 6억8,000만원을 지급하라는 게 우리 법원의 판결이었지만 미국 법정은 똑 같은 사안으로 숨진사람의 유족에게 1,1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우리 법정과 미국 법정이 같은 사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지난 15일 수도권 지역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66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는 것을 보고, 특히 21명이가로등 등지에서 흘러나온 전류에 감전사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만일 미국에서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번에 피해를입은 사람들이 서울시 등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듣고 있으나, 과연 얼마나 배상을 받을까 의구심부터 든다.
미국의 법체계라면 그야말로 서울시가파산할 정도로 엄청난 배상액이 나올 테지만 우리 법체계에서는 기껏해야 사망자에게 몇 억원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징벌적 배상’때문이다. 영미법에서 ‘punitive damages’ 또는‘exemplary damages’라 부르는 것이다.
피고의 잘못이 ‘폭력, 억압, 악의, 사기, 무모함, 사악한 행위’ 등으로 비롯됐을 경우실제 피해에 대한 배상을 넘어서 별도로 상당한 액수의 배상을 명령한다.
이는 비록 민사법정이지만 피고를 벌주는 의미에서, 그리고 비슷한 잘못이되풀이되지 않도록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에서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담배회사 등을 상대로 한 사건에서 천문학적인 배상액이 나오곤 한다. 그렇게함으로써 경제ㆍ사회적 강자(强者)가 약자(弱者)를 억지로라도 배려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장마철마다 ‘인재(人災)냐, 천재(天災)냐’ 하는 논란을 볼 때마다, 그리고 신용카드 회사가 고객의 신용정보를 보험회사에 빼돌렸는데도 법 미비로 무겁게 처벌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 법원에서도 징벌적 배상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아무리 재발방지를 외쳐도 매번 똑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만일 집중호우 때 감전사고로사망한 사람의 유족에게 법원에서 서울시 등의 잘못을 벌준다는 의미에서 10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다면 당장 감전사고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많은돈을 받는다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년 장마철에 같은 이유로 죽을 사람을 살리는 일은 될 것이다.
또 법원이 그렇게하면 소비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대기업의 횡포도 상당부분 자취를 감출 것이다.
더이상 우리 법관들이 ‘징벌적 배상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교과서에만 매달릴 게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사법부가 나서야 할 때다.
신재민 사회부장 jm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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