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8월부터 25년간 약 200회에 걸쳐 재일동포와 일본인처 등 9만3,000여명을 북한에 보낸 이른바 ‘귀국(북송)사업’에 대한 조총련의 법적 책임을 규명하는 재판이 27일 도쿄(東京) 지법에서 시작된다.조총련계 재일동포 출신으로 61년 북송선을 탔다가 이듬해 휴전선을 넘어 탈출,서울에 살고 있는 김행일(金幸一·59)씨가 조총련측에 약 500만엔의 위자료 등을 청구한 이번 소송은 북송사업의 책임을 따지는 최초의 재판이다.
공판에서는 당시 조총련측이 ‘지상 낙원’이라고 선전한 북한의 실상에 대한 논쟁이 핵심을 이룰 전망인 데다 ‘인도와 인권’의 명목으로 행해진 북송 사업의 실태가 도마위에 오를 전망이다.
김씨는 “동포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단체가 뻔히 실상을 알고서도 동포를 고통으로 내몬 책임은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조총련측은 “법정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당당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21일 산케이(産經)신문에 따르면 아이치(愛知)현 오카자키(岡崎)시 출신으로 나고야(名古屋)의 조총련계 조선학교를 중퇴한 김씨는 61년 6월 북송선을 탔다.
대학 진학을 희망하던 그에게 당시 조총련 간부는 “조국에는 실업자도 없고 빈부의 차도 없다”고 설명했으며 “정말 김일성 대학에 갈 수 있느냐”는 물음에 “틀림없다”고 밝혔다.
청진항에 도착하자상황은 전혀 달랐다. 2주간을 머문 초대소의 4인실은 곳곳에서 빗물이 스며들었다. 음식도 입에 대기 힘들 정도였다. 김씨는 여기서 러시아와의 국경인근 웅기종합기계공장으로 옮겨졌고 “일본 노동자의 생활상이나 사회제도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다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혹독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식량 배급이 부족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동료들이 잇따랐다. 북한의 실상에 절망한 김씨는 이듬해 11월 죽음을 각오한 탈출을 결행, 열차편으로 개성에 숨어든 후 밤을 틈타 휴전선을 넘었다.
김씨는 “비로소 자유롭게 일본에 드나들 수 있게 된 만큼 북한의 실상을 알려야한다고 결심,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도쿄=황영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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