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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 WP紙'일군 언론 女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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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 WP紙'일군 언론 女帝

입력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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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그레이엄 회장 타계‘언론계의 퍼스트 레이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철의 여인’, ‘여제’‥ 17일 유명을 달리한 고(故)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에 대해 미국 각계는 고인의 화려했던 삶 만큼이나 다양한 호칭을 추서하고있다. 하지만 미 언론계는 고인을 ‘최고의 정치정론지’으로 발돋움한 ‘워싱턴 포스트의 어머니’로기억하고 있다.

그레이엄 여사는 1917년6월16일 뉴욕시에서 부유한 유대계 이민의 후손유진 메이어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고인은 1938년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뒤 샌프란시스코 뉴스지에서 기자로 잠시 일하다 1939년 4월아버지 소유인 워싱턴 포스트에 몸을 담았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세계은행 초대 총재를 지낸 아버지가 1933년 82만5,000달러로인수할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파산상태였다. 남편 필립 그레이엄이발행인 자리를 물려받은 1946년부터 우울증으로 자살하던 1963년까지도 이 신문은 일개 지방지였다.

그레이엄 여사가 포스트를 세계의 대표적 신문으로 성장시킨 것은 외압에 굴하지않는 편집방향을 지킨 데서 비롯됐다. 1971년3월 경쟁지 뉴욕 타임스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로 만들어진 월남전 관련 극비문서‘펜타곤 페이퍼즈(Pentagon Papers)’를 특종보도했다.

리처드 닉슨 정부는 즉각 “국익을 해친다“며 출판정지가처분신청으로 후속보도를 중지시켰다. 하지만 별도 채널을 통해 보고서를 입수한포스트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감행했다.

3,500만달러규모의 주식상장을 앞두고 자문 변호사들이 보도중지를 건의했지만 그레이엄 여사는 귀를기울이지 않았다. 훗날 그레이엄 여사는 “국민의 알 권리와 국익보호사이에서 신문이 선택할 길은 국민편이었다”고 회고했다.

1974년에는 닉슨 전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워터게이트 사건이 워싱턴포스트의 전기가 됐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등 두 민완기자가 도청 사실을 포착하자 존 미첼 당시 법무장관은 “그레이엄의 젖가슴을 세탁기에넣고 짜 버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68년부터 23년간 편집국장을 지낸 벤 브래들리는 “회장은 편집인들과 적지않은 긴장과 마찰을 빚었지만 결정적인 경우에는 항상 편집국의 뜻을 수용했다”며 “오늘날의 포스트는 그녀가 이룩한 영광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좋은신문이라야 돈도 번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그녀는 가족 기업이었던 포스트를 신문, 잡지, TV, 케이블 및 교육사업 등을 망라하는 당당한 기업군으로 키워냈다. 워싱턴 사교계의 최대 명사이기도했던 그녀는 1997년 자서전 ‘개인의 역사(Personal History)’를 펴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syy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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