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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의사들 '새 길' 찾아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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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의사들 '새 길' 찾아나섰다

입력
2001.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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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딴 A(33)씨는 최근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남아있으면 교수직이 보장되고 개업도 할 수 있는데 굳이 떠날 필요가 있느냐”는 학교측의 만류도 부질없었다. A씨는 “고생을 하더라도 더 나은 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환규(盧煥圭.41)씨 명함에는 전혀 양립할 것 같지않은 ‘대표이사/흉부외과 전문의’ 직함이 함께 적혀있다.

지난 여름 의대교수직을 그만두고 온.오프 라인을 통한 헬스케어(건강관리)업체 ㈜에임메드를 설립했다.

의료계 전체가 전례없는 변화의 흐름에 휘말려 있다.

엘리트 의사나 의학도들이 가장 ‘명예로운’ 터전으로 여겨왔던 대학병원의 연구실과 진료실을 줄줄이 뛰쳐나가는가 하면, 어렵게 얻은 의사가운까지도 미련없이 벗어던진 채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학교를 떠나 개원의 대열에 합류하는 의대 교수들, 법조인이나 언론인, 비즈니스맨으로 속속 변신하는 젊은 의사들. 잡지마다 병원광고로 도배하다시피 하는 개원의들의 ‘바이 닥터(Buy Doctor)’ 열풍, ….

# 정체성을 회의하는 의사들

“의사 면허증을 받은 지 10년, 그리고 밤잠 안자고 수련받고 전문의 자격증 딴지 5년…. 의사는 누구인가? 의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환자들을 볼때면이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이웃 약국의 약사나 늙은 총각이 하는 건강상식과 다르다는 인식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

40대 초반의 내과 개원의가 최근 대한의사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다 자괴감을 토로한 글의 일부다. 의료계의 급격한 ‘뉴 트렌드(New Trend)’ 형성에는 어떻든 의약분업이 직접 계기가 된 게 사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재국(曺在國) 연구위원은 “지난해 의료분쟁으로 의사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급락하고, 수입변화 등으로 미래가 불안해진 의사들이 자연스럽게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이라고지적했다.

게다가 1980년대 이후 신설 의대의 난립에 따른 의사수의 급증 등 현실적 요인에다,갈피를 못잡는 정부 의료정책에 대한 불신의 의미도 담겨있다는 분석이다.

# 대학탈출, 개원 열풍

보건복지부 추정에 따르면 최근 1년 간 학교를 등진 의대교수들은 줄잡아 100명이 넘는다. 서울 K대의 경우 최근 안과교수 5명 전원이 사표를 내고 강남지역에 공동 개원, 의학계에 적지않은 충격을 던졌다.

20년 넘게 재직하던 학교에 최근 사표를 낸 B씨도 “의료계 권위가 땅에 떨어진 마당에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자신이 없었고, 개원의와의 소득격차도 부담이 됐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병원급 이상 대형의료기관 의사들의 개원 러시도 마찬가지다. 라석찬(羅錫燦)대한병원협회장은 “올들어 벌써 1,000명 이상이 개인이나 동업형태로 개원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다가는 병원들마다 인력난으로 절반이상이 도산할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 의사에서 벤처 기업인으로

서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치과 원장이던 박인출(朴仁出)씨는 지난해 진료를 접고 메디소프트라는의료컨설팅 회사의 대표가 됐다.

박씨는 “의료시장 개방 등을 앞두고 의사들이 관련 비즈니스에 뛰어드는 것은 국내 의료계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의대 피부과 및 성형외과 출신 개원의 45명은 지난해 12월초 피부의약전문 바이오 벤처기업 ㈜바임 래버러토리즈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피부진정 및 염증치료제 시제품 개발을 마치고 시판을 목전에 두고있다.

# 그 밖의 ‘신(新) 정체성’ 찾기

서울방송(SBS)의 기자 김현주(金賢珠.31)씨는 연세대 의대 재활의학과 전임의 출신. 지난해 의료사태를 겪으면서 진로를 틀었다.

“국민들에게 정확한 의학지식을 전달하는데서 오히려 의사로서의 보람을 찾을 수 있다”는게 방향 수정의 변(辯).

인턴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주간신문 ‘청년의사’를창간, 신문 발행인으로 뛰어든 박재영(朴在榮∙31)씨는 “병원 친구들과 비교해도 월급이 그다지 적지 않은 편”이라고 만족해 했다.

지난해 의료계 투쟁을 전면에서 이끌다 구속되기도 했던 신상진(申相珍) 전 의협 의권쟁취투쟁위원장은 최근 서울 마포에 한국의료정책연구소를 열었다.

신씨는 “이제는 의사가 의료정책을 입안해 정부측에 제시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 해외로 눈 돌리는 의사들

K대 레지던트 1년차 정모(30)씨는 10년 동안 그토록 어렵게 해온 의사공부를 홀연히 포기해 버리고는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주변에다는 “직업을 바꿔 현지에 눌러앉겠다”고 선언한 채.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는 소아과 개원의 박모(38)씨는 “여기서는 더 이상 의사로서 희망이 없는데다, 일반인의 눈길도 곱지않아 머물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인터넷 의사전용 사이트인‘메디게이트’(www.medigate.net)가 지난 5월 15~22일 의사 1,74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55%가 “취업이민을 심각히고려 중”이라고 답했다.

“관심있다”고 대답한 41%를 합치면 96%가 이민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셈. 또 이 사이트 내 미국 의사국가시험(USMLE)준비모임에도 무려 1,034명의 회원이 가입, 정보를 교환해가며 구체적인 ‘탈출준비’들을 하고 있다.

# 최근의 흐름은 생존을 위한 선택?

의료계 관계자들은“이제 더 이상 의료 행위를 ‘인술의 실천’으로만 보지말고 엄연한 ‘경제활동’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주문한다.

의사들의 변신을 ‘생존을 위한결단’으로 이해해 달라는 얘기다.

의료소송전문 S변호사는“모든 것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유독 의사들만 과거처럼 자격증 하나로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이 보장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요즘 의 추세는 크게 보아 전문직 일반에 대한 사회환경과 인식 변화의 반영”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과 김창엽(金昌燁) 교수는 우려스러운 표정이다. “의사는의료라는 공공서비스를 책임지는 전문인입니다.

사회가 의사들의 적정수입이나 안정성을 보장해 주지 않고 단순히 시장에만 맡길 경우 자칫 환자들에게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갈 수 있습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이민주기자

mjlee@hk.co.kr

■"개업하고 보니…" 명암

서울의 대표적 번화가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사거리의 A피부과의원. 120평을 쓰고 있는 병원 내부는 영락없는 고급 카페 분위기다.

은은한 조명아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환자대기실에는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원두커피와 다과, 읽을 거리들이 비치돼 있다. 바닥은 수입 대리석으로 깔았다.

2년전 문을 연 이 병원의 개원비용은12억원. S대 의대 동문 3명이 주택 담보대출 등으로 어렵게 출자금 4억원씩을 마련했지만 1년 만에 빚을 몽땅 갚았다.

하루 평균 70명 정도인 내원객들은대개가 의료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값비싼 치료를 받는 실속있는 환자들이다.

모발이식(400~500만원), 얼굴의 점과 주근깨를 빼는 레이저 시술(100~150만원),얼굴 박피(70만원), 여드름 관리(5~15만원) 등이 주류.

이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월평균 2억원 안팎. 간호사와 피부관리사 15명의 월급과 지하철역, 여성월간지, 유선방송 광고비 와 임대료 등을 빼고도 1억5,000만원 가량이순수익으로 남는다.

“중소대학병원 교수로 근무했는데 보람을 느낄만 한 게 없었어요. 봉급도 적고 연구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 환자수를 늘리라는병원측의 강요도 부담스러웠고요.

이럴 바에야 돈이나 확실히 벌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L원장은 그러나 이런 호황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으로 보고있다.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 “주변에 대형 피부과가 10곳이나 됩니다. 결국 돈 싸움이죠.

당장 광고비를 2배로 늘릴 작정입니다.”

반면 안과 전문의인 C씨(37)는지난해 8월 연고도 없는 충북 청주에 3억원을 들여 개업을 했다가 낭패를 봤다. “서울에선 경쟁력이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일단 시설이 크지 않으면 환자를 끌 수 없는 분위기거든요.”

최근들어 안과에는 시력교정을 위한라식(400~500만원) 이나 백내장 수술(150만원) 등의 ‘알짜배기’ 수요가 크게 느는 추세. 그러나 시장규모가 작아서일까.

월 3,000만원 정도의 매출로 근근히 대출금과 병원 운영비용을 충당했다.더욱 괴로웠던 것은 자신을 ‘굴러온 돌’ 취급하는 다른 개업의들의 텃세와 견제.

그는 결국 2억원이 넘는 빚을떠안은 채 8개월만에 병원을 정리하고 다시 상경한 뒤 석달 째 종합병원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개업만 하면 다잘 되는 줄 알고 덤볐는데 모든 걸 잃어버린 꼴이 됐어요.

유성식기자

ssyoo@hk.co.kr

■19년째 무료진료 이기섭씨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누군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의료계의 드문 ‘사표(師表)’로 존경받는 이기섭(李基燮ㆍ88) 박사는 “의사야말로 정말로 좋은 직업”이라는 말을 거듭 되뇌었다.

1962년 이화여대부속병원장을 그만두고 강원 속초로 내려온 이 박사는 82년 속초도립병원 외과과장을 끝으로 현직에서 은퇴한 이후19년 째 매주 목요일마다 양양군 산골마을의 무의탁노인을 상대로 무료진료 활동을 해 오고 있다.

의사로서 최절정기에 선뜻 서울을 버린데는 뭔가 심오한 뜻이 있을 듯 싶었는데, 그는 뜻밖에 “설악산이 너무 좋아서”라며 한바탕 웃었다.“

사실 유복한 선친을 만나 일본유학을 하는 등 혜택받은삶을 살았습니다. 누린 만큼 조금은 베풀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 뿐이에요.”

속초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닿는 산골 서림리 보건진료소는 매주 목요일마다 진료나 처방보다는 이 박사와의 한마디 대화를 위해모여든 촌로들로 북적댄다. 그들에게 이 박사는 친구이자 동네 어른같은 존재다.

하지만 이 박사는 지역 의사회 모임 등에는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됐다. “전에는 환자에게 증상을 물어 진단하고 애매할 때만 혈액, 소변검사 따위를 했는데 요즘은 X-레이,MRI 등 안해도 될 검사를 일단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요.

돈 때문인 것 같아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했더니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고 항변하더군요. 의사의자세는 그게 아닌데…”

이 박사는 “의사에게서 헌신의 덕목을 빼면 기술꾼, 장사꾼 이상의 취급을 받기 어렵다”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던 초심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평생, 그것도 ‘좋은 시절’에 의사를 해온 그의 재산은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약간의 예금이 전부. “돈을 모아두지 않았더니 자식들이 우애가 좋습니다.

늘그막에 이만한 행복도 없지요.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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