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보았다”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신문기사가 그런대로 독자의 신뢰를 받을 때의 얘기다. 이때만 해도 신문기사는 그런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하지만 요즈음은 어떠한가.
“제대로 좀 써라”, “진실은 하나인데 왜 신문마다 제 각각이냐”,“아무리 읽어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등이 지적이 줄을 잇는다.
그나마 아직도 신문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는 목소리다. 아예꼴도 보기 싫다며 신문을 끊어 버리겠다는 막말도 나온다.
언론사 세무조사로 인한 ‘언론전쟁’이시작된 후의 ‘신문의 자화상’이다. 한마디로 신문에 대한 신뢰의 위기다.
언론사 세무조사를 놓고 국론분열은이미 극에 달했다.
정치권은 정쟁의 한 가운데에 세무조사를 가져다 놓고 막말을 토해낸다. 사생결단의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가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고 ‘배수의진’을 쳤다.
여당에 의하면 언론사 세무조사는 조세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당한 법 집행이다.언론에 묵인돼온 불합리한 특혜를 바로 잡는 사회개혁운동이다.
하지만 야당에 따르면 세무조사는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몇몇 신문을 때려 잡기 위한언론탄압이다.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정권이 재 집권을 위해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하고 있는 엄청난 음모다.
주장의 근거와 논거가 제시되지않은 채 반격과 재 반격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가뜩이나 팽배해진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커져만 간다.
정치권의 극한대립에 완충 역할을해야 할 신문의 경우는 더 한심하다. 신문이 오히려 극한대립의 진원지다.
세무조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몇몇 신문은 집단 히스테리 상태다. 동업자의 상식으로 봐도 자사 이기주의에 충실한 무리한 보도가 많다.
논조나 보도 방향 설정에서 균형이 깨졌고 기자로서 기켜야 할 최소한의 양식이 내 팽겨쳐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술자리에서의 욕지거리가 주요기사로 취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업자의 눈에 비친 신문의 모습이 이러할진데 독자에게는 물어보나마나다.
사회통합과 갈등의 조정에 기여해야 할 언론과 정치권이 제 기능은 고사하고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론분열이 심각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문은 나라 걱정에앞서 자기 걱정부터 해야 할 처지가 됐다. 도덕성과 사실보도를 기초로 해야 할 신문의 신뢰성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신문의 도덕성은 세무조사의 목적이 어디 있든지간에 치명상을 입었다. 신문은 기업규모에 비해 감당하기 힘든 액수의 세금을 얻어 맞았다고 주장한다.
뒤집어 말하면 그 만큼 탈세의정도가 심했다는 얘기가 된다. 세금은 돈을 벌어서 내면 되고 잘못 부과된 세금은 법에 따른 구제절차를 밟아 바로 잡으면 된다. 물론 도덕성 회복을위해서는 앞으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정부가 언론탄압을 위해 세무조사를 했다면 오히려 신문에게 좋은 기회다. 권력의 신문에 대한 박해와 탄압은 신문의 새로운 응전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부당한 탄압은 어느 경우에도 신문의 정당한 저항을 누르지 못했다. 만약 정권이 정치적 음모를 달성하기 위해 세무조사를 했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국민이 용납치 않을 것이고 우리사회는 정치적 음모에 놀아날 정도의 수준은 벗어나 있다. 세무조사에 대한 여야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옳은지는 유권자인 국민이 내년의 선거에서 표로 심판할 일이다.
문제는 신문이 자기 입장을 변명하는 데 급급하다 보면 신문의 존재이유인 사실보도가 등한시될 것이라는 데 있다.
사실보도의 소홀은 신문의 신뢰추락과 독자로부터의 외면을 가져온다. 신문 스스로가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 신문이 독자로부터 불신을 당하는 것은 신문과 독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신문에서 보았다”라는 말이 조금이라도 통해야 사회가 건전해진다. 신문은 더 늦기전에 정신 차려야 한다.
이병규 정치부장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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