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도서관 콘텐츠 확충과 책읽는사회 만들기 국민운동'의 공동대표를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경희대 도정일 교수는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라고묻는다.사람들은 요즘 정말 어떤 책들을 읽고 지낼까. 시집, 소설, 수필집, 아니면 돈 벌게 해주는 책? 하지만 그가 가장 자주 듣는 대답은 아마 "책이요, 읽어본 지 오래 됐는데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대한민국은 문맹도는 거의 세계 최저이지만'책맹도(冊盲度)'는 OECD국가 중 최고인 참으로 묘한 나라다.
미국에 살던 시절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의 상당수가 최소한의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글도 읽지 못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거의 전 국민이 신문을 읽는다. 이런 나라가과연 세계에 몇이나 더 있을까. 참으로 대단한 힘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그 힘을 쓰지 않고 있다.
나는 주변에서 "우리 애는 책을읽지 않아요.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소연하는 부모들을 종종 본다.
그런데 그런 집에 가보면 책이 없다. 부모가 쓰는 공간에 책이 없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이들 책꽂이에도 교과서와 참고서를 빼고는 별로 없다.
내가 자랄 때 마치 유행처럼 부모들이 너도나도 사서 꽂아주던 그 흔한 전집들도 요즘 아이들 책꽂이엔 잘 보이지 않는다.
전자오락기구와 게임들만 어지러이 널려 있다. 거실의 텔레비전은 늘 큰소리로 울부짖고. 부모도 읽지 않으면서 아이들더러 읽으라 한다.
결코 한가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못 되지만나는 매년 여름 짧게라도 가족과 함께 미국에 다녀온다.
미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다 아빠가 한국 대학에 교수가 되겠노라고 귀국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아들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애정표현이라 생각하고 몇 푼 벌지도 못하는 대학교수 월급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귀국한이후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지켜왔다.
또 아내와 내게는 학문적인자극제가 되는 기간이다. 예전에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을 만나 자꾸만 저만치 앞서가는 그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요즘 학계가 돌아가는 냄새를 맡기도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우리 가족은 좀 재미없는가족인 것 같다. 쉽지 않은 외국여행이고 어렵게 나마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날을 마련해 놓고는 정작 아침부터 "자, 그럼 오늘 뭘 할까"라는질문만 몇 번씩 서로에게 던지곤 한다.
그러다 보면 거의 언제나 누가 꼭 제안을 한 것도 아닌데도 자연스레 책방 앞에 서고 만다. 미국에는 차를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쾌적한 대형서점들이 많이 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우리 나라의 서점들과는 사뭇 다르다. 꼭 세 시간만 읽기로 약속하며 각자의 코너로 헤어진 우리 가족이 서점을 나서는 것은 거의 언제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다. 각자 한 보따리씩 새 책을 사 들고 말이다.
앎을 향한 열망은 우리 인간 유전자 안에 뚜렷이 박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오늘 날 이 지구를 호령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앎의 방법까지 우리 유전자에 적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보고 베끼기도 하고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듣고 배우기도 한다.
책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 지식을얻는 것은 어릴 적부터 습관이 되지 않는 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류가 탄생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600백만년 전이지만 활자가 만들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불출'이 될 걸 뻔히 알면서도 아내와자식 자랑을 한 가지만 하련다. 비록 내가 세상에 장서가니 독서광이니 하며 좀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리 집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민다.
아들녀석을 잠자리에 뉘려면 매일 저녁 승강이를 해야 한다. 조금만 더 읽게 해달라는 아들을 윽박질러 재워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안고 산다.
아내도아들 못지 않은 독서광이다. 내가 어쩌다 책을 쥐고 있으면 무슨 책이냐며 빼앗아 다 읽고 난 뒤 돌려준다.
아내와 나는 아들이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줄기차게 책을 읽어 주었다.이제 겨우 열두 살이지만 아들 녀석이 읽은 책이 족히 5,000권은 더 되리라.
부모가 책을 읽지 않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읽길 기대하는가. 또 책이 손 닿는 곳에 없는데 어떻게 쉽사리 읽게 되겠는가.
책이 가까이 없기는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의 공공도서관 수는 겨우 400개. 미국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책을 비교하면 더 초라해진다. 입만 열면 세계적인 대학으로 도약하겠다는'민족의 대학' 서울대학교의 도서관 장서보유 수준은 하버드대학의 15%에도 못 미친다. 이웃 나라 일본의 도쿄(東京)대학은 세계 6위 수준이란다.
얼마 전 김영환 과기부 장관이 기획하고 김수환 추기경이 기꺼이 앞장서 주신 '사이언스북스타트운동'에 기대를 걸어본다.
책 읽는 습관은 어려서부터 길러줘야 한다. 하지만 조심하라. 일단 습관이되면 담배 끊기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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