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멕시코월드컵 예선전은 출발부터 좋지 않았다. 당시 최순호, 허정무등 호화멤버를 보유한데다 2년전 멕시코에서 4강신화를 이뤘던 청소년대표의 영향 때문에 국민의 기대는 엄청났다.하지만 1차 예선에서 말레이시아에0_1로 충격의 패배를 당하자 국민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고참선수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문정식감독이 해임됐다.
김정남감독의 부임 이후 우리는심기일전, 네팔을 4_0, 말레이시아를 2_0으로 꺾고 2차 예선에 진출했다. 김종부, 김주성을 보강한 우리는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이후 상대전적에서 한국에 앞선다”며 희망에 들떠있던일본에 2연승, 32년만에 감격의 월드컵 무대를 다시 밟게 됐다.
미국 덴버에서 한달간 고지훈련을 마친 우리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차범근을 보강, 무너진 건물이 도처에 있을 만큼 지진 피해 복구가 완료되지 않은 멕시코로 향했다.
1차전 상대는 마라도나가 버틴 아르헨티나. 너무 얼어붙어 전반에만 3골을 뺏긴 우리는 후반 27분 내가 성공시킨 중거리슛으로 영패를 모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 골지역 약간 오른쪽에 있던 나는 최순호의 패스를 받는 순간 ‘찬스’라는 느낌이 와 그래로 오른발슛, 한국의 월드컵 1호골을 기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때 두손을 맞잡고 환호했던 것은 골세레모니가 아니라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라도나는 순발력, 볼콘트롤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같은 위치에서 공을 다퉈도 늘 그가 공을 먼저 차지했다.
이후 한국은 불가리아에 아쉽게 1_1로 비기고 이탈리아에 2_3 패, 종합전적1무2패로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하지만 우리는 멕시코 대회서 한국도 세계적인 강호를 상대로 골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 뿌듯했다.
대회후 충격을 받은 우리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후진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축구는 그 때에 비해 발전이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도 그점이 안타깝다.
이범구기자
lbk1216@hk.co.kr
■86년 멕시코대회
1986년 멕시코월드컵은 원래 콜롬비아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콜롬비아가 경제위기등을 내세워 개최권을 반납, 미국과 경합 끝에 멕시코에게 돌아 갔다. 멕시코는 월드컵 개막 1년전인 1985년 9월 1만여명의 사망자를 낸 대지진이 일어났으나 폐허의 와중에서도 월드컵 유치를 강행했다.
멕시코월드컵 최고 스타는 한국전에서 세골을 모두 어시스트한 ‘축구천재’ 디에고 마라도나.
마라도나는 포클랜드 전쟁 당사자끼리 맞붙은 잉글랜드와의 준준결승서 ‘신의 손’ 논쟁을 불러일으킨 핸들링골과 환상적인 60m 단독드리블 슛으로 2_1 승리를 이끌어 조국에 4년전의 패전에 대한 위안을 선물했다.
벨기에와의 준결승서도 팀의 2골을 모두 잡아낸 마라도나는 남미팀과의 역대전적(8승2무)서 무패를 자랑하던 서독과의 결승에서 마지막 골을 어시스트, 팀의 3-2승을 이끌었다.
마라도나는 이대회서 팀의 14골중 5골 5어시스트를 혼자 뽑아내는 발군의 활약을펼쳤다. 펠레 이후 ‘천재’로 떠오른 마라도나가 잉글랜드전에서 보였던 단독 드리블슛은 지금도 월드컵 최고의 골중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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