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속으로] 蘆溝橋事件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속으로] 蘆溝橋事件

입력
2001.07.07 00:00
0 0

1937년 7월7일밤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소도시 루거우차오(蘆溝橋) 부근의 펑타이(豊台)에서 일본군이 야간 훈련을 하던 중 주변에서 10여 발의 총성이 울렸다.일본군은 중국군이 고의로 도발을 했다며 펑타이의 보병 연대를 즉시 출동시켜 루거우차오의 중국군을 공격했다. 이것이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루거우차오 사건이다.

다음날 루거우차오는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사건의 발단이었던 7월7일 밤의 사격이 일본군의 자작극이었는지 아니면 중국 항일 세력의 행동이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중국군이 루거우차오에서 물러나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될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대륙에 군대를 증파해 그 달28일 베이징과 톈진(天津)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로써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전면 전쟁에 돌입했다.

1931년의 만주침략 때 그랬듯 일본은 이번에도 중국에 선전 포고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주 침략을 전쟁이 아니라 ‘만주 사변’이라고 불렀듯, 이번에도 중국과의 전쟁을 ‘지나 사변’이라고 불렀다. 일본군의 침략은 파죽지세였다.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한 일본군은 상하이를 거쳐 1937년말 국민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뒤 민간인 수십만명을 학살했다. 일본의 우익은 지금도 이 난징 대학살을 부정한다. 중국은 제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구축해 맞섰다.

중국군의 유격전에 밀려 일본군은 광범한 전선에서 단지 점(도시)과 선(도로)을 장악하는 데 그쳤지만, 그런상황에서도 이들은 극도의 잔학행위를 일삼으며 전쟁 기간 동안 중국인 1,200만 명을 살해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일본은 이를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했지만 결국 패배해 1945년 8월15일 연합국에 항복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