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업계에 무한경쟁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40줄에라도 사법시험만 합격하면 인생이 핀다’던과거의 영화는 이미 오래 전 얘기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졌고, 먹고 살기 힘든 변호사는 떠나야 하는 ‘정글의 법칙’이 자리잡았다.또 대형 로펌(Lawfirmㆍ법률회사)간 합종연횡이 계속되고, 9일부터 변호사 광고가 전면 허용되는 등 내년이면 사시정원 1,000명 시대를 맞는변호사 업계가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요동치고 있다.
■ '거저먹기’식 수임은 옛말
고질적 관행이던 전관예우가 약화함에 따라 ‘거저먹기식’ 수임이 거의 사라졌다. 전관 ‘약효’가 과거1년에서 6개월 이내로 줄었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전관 소문만 나면 1년 안에 10억원도 거뜬하다던 농담은 이제 옛 얘기다. 전관사건의 패소율이 높아짐에 따라 전관 변호사들도 안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법률 수요자들의 수준도 높아져 최근 들어 서비스에 불만을 느낀 의뢰인들이 적극적으로 소송을 제기해변호사가 피고석에 앉는 사례가 잦아졌다. 서울지법은 지난달 변론을 성실히 하지 않은 S변호사, K변호사에 대해 각각 1억원과 2,000만원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지난 해 변호사서비스 관련피해를 구제한 105건 가운데 65건(약 62%)이 과다한 수임료 및 보수 등에 관한 사항이었다.
■ 사건수임 의뢰인 중심으로
“회사가 로펌을 쇼핑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의뢰인 중심으로 사건수임 관행이 바뀐 것도 무한경쟁이낳은 중요한 변화다. 로펌 관계자들에 따르면 삼성, 현대 등 주요 기업들은 한 곳의 로펌하고만 거래하지 않고 사안별로 별개의 로펌에 소송을 위임한다.
회사측은 통상 4개 정도의 로펌에 수임관련 입찰 제안서를 보낸 뒤 각 로펌의 태스크포스팀이 회신한 소송 전망과 수임료, 변호사 진용 등을 보고수임계약을 맺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A로펌은 지난해 삼미특수강이 포철을 상대로 낸 800억대 소송에서 착수금 5억원 및 성공보수금20억원을 제안했지만 거절 당했고, 수임계약은 착수금을 불과 5,000만원만 적어 낸 B로펌에게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조사 결과, 변호사 1인당 수임건수는 96년 58.5건, 97년 57.2건,98년53.3건, 99년 46.9건, 2000년 41.5건으로 계속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개업변호사가 살아 남기 힘든 상황이 됐다는 얘기다. 서울변회 관계자는 “개업 변호사들이 1년에도 수십 명씩 지방으로 내려가고, 개인사무실 문을 닫는 변호사들도 속출하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앞으로열릴 WTO 뉴밀레니엄라운드 협상 테이블에서 법률시장 개방 수준이 확정돼 외국의 대형 로펌이 몰려온다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변호사들이 생겨날가능성도 있다.
■ 대형화, 전문화로 간다
지난달 7일 법무법인 한미와 광장이 합병, 외형상 업계 2위인 ‘광장(변호사 117명)’이 탄생했다.직전까지 업계 2위였던 ‘세종(변호사 104명)’이 올해 1월 최초 합병으로 설립한 이후 두 번째다. 부동의 1위인 ‘김&장(변호사195명)’에 이어 2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합병이 성사되는 것은 법률시장 개방시대에는 대형화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란 업계의 판단 때문이다.
중소 로펌들은 특정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이른바 ‘부티크 로펌(Boutique Lawfirm)’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 탈법으로 얼룩진 과잉경쟁
“주취급 분야 000, 수임료 000원, 성심껏 도와드립니다. ” 개업인사 광고 정도만 허용하던 변호사광고를 폭 넓게 허용하는 대한변협의 관련 개정안이 9일 최종 통과를 남겨두고 있다.
이와 관련 벌써부터 “변호사 업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질 것”이라는 등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대세는 “무한경쟁 시대에 더 이상 얌전빼고 살 수는 없다”는 허용론 쪽이다. 이미 경기 김포 지역에서는 중소 로펌이 국내 최초로 유선방송국을 통해 방송광고에 들어갔다.
무한경쟁은 변호사 업계를 탈법(脫法)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지난달엔 피고인과 증인에게 허위증언을교사한 제주도의 한 변호사가 법정구속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에만 하영주, 박병일, 강동범 변호사 등 4명이 개인비리로 구속됐다.
대법관 출신의 한 원로 변호사는 “시민단체가 활성화하기 전인 60,70년대 변호사 단체가 누리던 권위가이제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면서 “업계의 경쟁이 위법ㆍ탈선 변호사를 낳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며 씁쓸해 했다.
서울지방 변호사회는 최근 1년에 30시간씩 공익활동을 의무화했던 조항을 1년도 채 안돼 20시간으로줄이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무한경쟁에 휩쓸린 변호사 업계가 명분보다 실리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중소로펌 '틈새 비집기'
“틈새 시장을 노려라.” 공룡 로펌들의 틈바구니에서 중소 로펌들은‘전문성’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분쟁해결에 전문지식이 필요한 언론, 국방, 벤처기업, 의료, 연예, 북한 관련 등이 이들이 노리는 틈새시장.
사법연수원 30기 변호사 5명이 모여 만든 정세(대표변호사 류홍섭)는 언론분쟁에 주목했다. 정세의한상혁(韓相赫) 변호사는 “외국에서 보듯이 앞으로 가장 많이 늘어날 소송이 언론분야”라며 “당분간 공익적 성격으로 운영하면서 언론 분쟁의 법률시장을 넓혀갈 것”이라고 밝혔다.
군법무관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변호사들이 만든 YBL(대표변호사 이재민)은 자신들의 경력을 ‘무기’로내세운 로펌이다.
YBL은 “군 내부 훈령 등에 의해 처분되는 경우가 많은 군 관련 소송에서는 법무관 출신이 이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기업의군납에 대한 법률자문, 미군 등에 대한 환경오염 소송, 군 내 재해ㆍ사고 등이 이들의 전문분야.
법무법인 세종 출신 변호사들이 만든 지평(대표변호사 강금실)은 벤처기업의 계약, 인수합병, 지적재산권분쟁 등 벤처 기업관련 법률시장을 먼저 개척했다.
지평의 양영태(梁榮太) 변호사는 “현재 테헤란 벨리 70~80개 기업의 법률자문을 하고 있다”며“대형 로펌 의뢰비용이 버거운 벤처기업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귀띔했다. 의료 전문 로펌인 한강(대표변호사 최재천)은 의료분야의 노하우를 기반으로산업재해 소송으로 분야를 넓히고 있다.
이밖에 계약 및 저작권과 관련해 소송이 많은 연예분야, 남ㆍ북 재산 분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이는북한 관련 법률시장도 중소 로펌들이 진출을 준비하는 분야이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로펌동기생 10~20명 '입사=새고생 시작'
이제는 로펌 내부에서도 ‘약육강식’의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업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때문에 연수원출신의 개업 변호사들이 생계를 걱정해야 할 지경까지 다다르자, 연수생들의 로펌행이 과거보다 활발해졌기 때문. 과거 한 기수 당 3,4명에 불과했던 로펌 동기들이 이제는 10~20명으로 늘어나 로펌 내에서도 사건 수임 등을 놓고 불꽃이 튀고 있다.
일례로 로펌 변호사들의 최대 메리트였던 법학 석사과정(LLM) 이수를 위해 해외로 떠나는 변호사 연차가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5년차 로펌 변호사는 누구나 1년간의 LLM과정과 1년간의 주재국 로펌 근무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동기생들이 늘어 이마저도 나눠보내야 하는 실정. 일부 로펌에서는 7,8년차가 돼서야 외국에 나가는 경우도 생겼다.
로펌 동기생간의 연봉격차도 커지고 있다. 현재 로펌은 입사 초기부터 변호사의 연봉 수준을 철저히 숨겨동기들조차 서로의 연봉 수준을 모를 정도. 한 로펌 관계자는 “현재 5년차 이상의 변호사 중에는 연봉 격차가 2배 이상 나는 곳도 있다”고 전했다.
또 로펌의 지분을 갖게 되는 자격인 이른바 ‘구성원(partner) 변호사’도 과거 12,13년차면충분했던 것이, 이제는 ‘파트너심사위원회’ 등의 심사를 거쳐야 돼 조만간 오랜 근무 연수에도 불구하고 구성원 변호사가 되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날것으로 보인다.
로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과거 5년차 마치고 외국에 다녀온 뒤 소규모지만 로펌 지분을 행사할 수 있는 ‘주니어(Junior) 구성원변호사’ 자격을 주는 관행이 사라진 곳도 적지 않다.
로펌의 한 관계자는 “최근 기업 상담을 주로 하는 팀이 같은 로펌 내 송무팀을 제쳐놓고 소송까지 수임해 잡음이 인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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