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말에 들어선 대통령이 다음 정권을 구속할 대외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가.미국의 정책 계간지 ‘워싱턴 쿼털리’ 최신호에 실린 한 보고서는 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정권 전환기 외교정책이 빠질 수 있는함정을 경고하고 있다.일견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대외정책을 펴는 바람에 빚어지는 국제적 마찰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설명하고 싶었던보수파의 동기가 감지되는 의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는 언제든지 토론의 여지가 충분한 관점이기도 하다.
보고서는 전임 빌 클린턴 정권이 임기를 불과 몇 달 앞둔 시기에 강력하게 추진한외교정책 중 중동평화 회담과 북한 미사일협상을 문제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철학과 가치관, 그에 따른 정책순위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후임정권에게 결정적 운신의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무리한 정책추진은 도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부당하다는 게 보고서의 요지다. 이런 외교를 ‘레임덕 외교’라고 칭하면서 보고서의 제목도 그 같이 달았다.
임기말 클린턴 정부의 북한 미사일 협상이 타결의 문턱까지 갔었다는 사실은 이미알려져 있다. 그러나 ‘레임 덕 외교’가 위험한 것은 임기 말 정권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된다.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왜’ 하느냐를더 주시해야 한다는 것인데, 결국 국가이익을 생각하는 공적 동기보다는 자신의 업적에 집착하는 사적 동기에 빠져들기 쉽다는 얘기이다.
사실 공화당 정권이새로 검토해 내놓은 정책노선들이 세계를 시끄럽게 한 것은 한 둘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깝게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회의적”으로 지칭한북한정책에서부터 미사일 방어(MD)체제 강행, 기후변화 협약에 관한 교토(京都)의정서 일방탈퇴 등이 모두 국제적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보고서의논리대로라면 이런 주요 정책들이 바로 클린턴 정부의 ‘레임 덕 외교’ 의 산물들이고, 새로 들어선 조지 W 부시 정부가 이를 바로 잡는 것은 정당하고타당하다는 것이다.
공화당 정권이 세계적 이슈에서 문제시 당하는 데 대한 방어논리이자, 좀 지나치게 말한다면 국내는 물론, 세계를 향해 반박에나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비슷한 인상은 미국외교관들과 최근의 남북문제를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부시 대통령의 “회의(skepticism)”라는 한 마디의 파괴력으로 남북관계가 일거에 중지되면서부시 정부의 귀책론이 서서히 나오려 했던 게 얼마 전이다.
그러나 지난 달 6일 미국의 대북 대화재개 선언이 천명된 이후 미국 조야에서 등장하는논리는 ‘북한 귀책론’이다.
대화의사를 밝혔으니 이제 북한이 응답할 차례이고,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지체된다면 그 것은 김정일 때문이라는 주장이학자들의 논문과, 외교관들 발언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한 외교관은 남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면서 “김대중(金大中)정부의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도가 50%를 밑돌지만, 이는 바로 한국민들의 김정일에 대한 실망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북한문제를미국 자신의 문제로 대처하려는 인식이 강할수록 북한의 선택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이 제시한 까다로운 대북 의제들이 이를 말해준다.
지금 관심을 가질대목은 지난 달 6일 이후 북미간 의례적인 한 차례의 뉴욕접촉 외에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남북관계에서차지하는 국내변수의 중요성이다. 가장 먼저 미국의 정권교체, 이에따른 정책 재검토가 관계정체를 불러온 이후, 작금의 한국내사정은 갈수록 남북문제에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극도의 정치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가령 김 대통령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의서울답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올해를 넘긴다면 내년엔 더욱 어렵다. 약해진 정부의 지지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문제는 내년이 바로 임기말 레임 덕의 해라는 점이다.
‘레임 덕 외교’의 문제를제기하는 공화당 사람들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대목이라고 보면 남북문제가 다시 ‘게임’의 수준으로 돌아가는 형국이 아닌지 모르겠다.
조재용 국제부장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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