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시인의 시집 ‘어느날 나는 흐린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얽힌 일화입니다. 황 시인은 이 시집을 묶으면서 제목을 시집에 실린 시들 중 한 편의 제목인‘등우량선(等雨量線)’으로 하자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출판사 편집부 담당자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런 제목은 안 된다는 거였지요.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시집은 근래 드문 베스트셀러 시집이 됐고, 덕분에 황 시인은‘내 집 마련’까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울시내 대형 서점들이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를 발표했습니다. 황 시인의 시집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목록을 보고 든 생각 때문입니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종합 50위에 든 시집은 1권, 종로서적이 발표한 종합 50위에 든시집은 5권이나 됩니다.
정말 한국은 대단한 ‘시의 나라’입니다. 1년에 발간되는시집만 1,500여 권입니다. 그 중 몇몇은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지구상에 이처럼시를 사랑하는 국민은 없다”고 외국 시인들은 부러워합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한국을비롯해 칠레, 콜롬비아 같은 남미 국가들처럼 자본주의가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기현상”이라고비꼬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이번 베스트셀러 목록에 든 시집들 중 이른바 문단에서 인정받는 시인,시집이 발표되고 언론매체나 문학지에서 리뷰가 된 시집은 단 한 권도 없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집이 만약 ‘등우량선’이라는어려운 제목으로 나왔다면 그처럼 베스트셀러가 됐을까요? 아닐 겁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건 우리 문단의 시인들이 대중의정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큰 우려가 드는 것은 대중적인 시집이 가져올 그릇된 영향입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들은주로 청소년들의 ‘팬시 상품’처럼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과서에 실린 빼어나다는 시들조차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입시를위한 해체의 대상이 되는 판국에, ‘정신을 담는 최고 수준의 예술 형태’라는 시가 대중의기호에 영합해 아무렇게나 ‘유통’되는 상품으로 전락해서는 안될 겁니다.
“시를 읽어도 세월은가도,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보낸 사람에 비해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불행하다.”
한 젊은 시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값싼 언어에만 노출되는 세월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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