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초 미국 이베이에 인수된 온라인 경매업체 옥션의 최상기 홍보과장 명함에는 영어 이름과 함께 이베이의 회사 로고가 선명히 박혀있다. 최과장은 “처음에는 동료들이 e-메일을 영어로 작성하고,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했지만 이제는 다들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자본으로 인한 변화를 가장 실감하는 이들은 당연히 해당기업 임직원들이다.상황을 인정한다 해도 오랫동안 익숙해진 풍토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역시 간단치 않다.▦ 외국어는 필수
미국 뉴브리지 캐피탈의 투자로 외국계 은행이 된 제일은행 임직원들은 이제 서로 영어로 얘기하는 일이 어색하지 않다. 외국인 임원이 등장하고 영어 회의가 일상화하면서 영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때문이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는 영어에 익숙치 않은 임직원을 위해 전문 통역사를 두고있지만 이런 배려는 흔치 않다.
옥션 최 과장은 “회사가 강요하진 않지만 동료들 사이에 영어를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있다”고 말했다. 제일은행,LG텔레콤,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코리아후지제록스는 사측이 학원 수강료를 지불하거나 사내 어학원을 운영해 직원들의 외국어 학습을 지원하고 있다.
▦ 업무는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한국쉘은 임직원이 10만원 이상 선물을 받을 경우 서면보고하고 회사에 귀속시키도록 했다. 한국다우코닝은 사업과 관련없는 접대를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었고, 한국IBM은 판촉용 물품이 아닌 선물을 공급자나 고객에게 줄 수 없도록 했다.
명문 규정을 두지 않더라도 결제 과정을 까다롭게 해 기밀비 지출을 어렵게 만드는 곳도 상당수다. 한국 특유의 접대 문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것이다.
상사와 직원간의 관계도 상하에서 수평 개념으로 바뀌었다. 지난해말 최대 주주가일본계 소프트뱅크로 바뀐 두루넷의 한대성 홍보팀장은 “사장이 불쑥 전화를 걸어 업무 사항을 질문한다”며 “처음엔긴장했지만 이제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한국오라클 임직원들은 업무목표를 사내 근태관리 시스템에 입력하고 평가받는다. 홍보 담당 직원이라면 행사를 몇번 치렀고 기사 몇건을 보도되도록 하겠다는 식이다. 이와 함께 대리ㆍ과장ㆍ부장 직급 명칭을 없애고 팀장ㆍ실장ㆍ본부장으로 이어지는 직함만 사용토록 했다. 직원들끼리의 호칭은 아예 ‘선생님’이 됐다.
이런 변화들은 확실히 기업경영에 성과를 내고 있다. 부실 채권이 많았던 제일은행이 지난 1ㆍ4분기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 자본 비율이 14.01%로 국내 은행중 최고 수준에 달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
▦ 갑작스런 변화에 갈등도
그렇지만 외자유치 기업의 임직원들은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않다고 입을 모은다. LG텔레콤의 한 직원은 “업무 강도와 직무수준 요구치가 높아져 스트레스와 자기 관리 부담이 크게 늘었다”면서“게다가 술자리에서 동료애를 다지고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문화마저 사라져 직장생활이 점점 삭막해져가는 느낌”이라고 털어 놓았다.
한국식 접대 문화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접대비 폐지로 당장 어려움을 겪고있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외자유치 기업의 한 홍보직원은 “기업 설명회를 가지면서 참석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문제를 놓고 외국인 상사와 설전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한국식 접대 문화의 필요성을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외자 금융회사 직원 하소연
얼마전 미국계 자본에 의해 인수된 금융회사 직원 A(36)씨. 입사 10년째인데 아직 대리다. “승진이요? 구조조정 와중에 살아남은 것만도 다행이지요. 매달 책정된 실적을 올리기에도 숨이 턱에 찹니다.”
A씨는 회사가 외자기업으로 탈바꿈하면서 ‘실적지상주의’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당해보니 그 압박은 상상 이상이었다며 혀를 내두른다. A씨는올초 자신의 1년 수신 목표치를 적어냈다.
연말에 성취도를 상·중·하로평가해 인센티브를 준다는 회사 방침에 따른 것. 노조의 반대 때문에 아직 연봉제가 도입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연봉제와 재임용의 기준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직원들은 예상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자기 일이 끝나면 언제든 퇴근해도 좋다는 식인데, 그게 더 무섭지요. 일을 찾아하면 끝이 없고 옆 동료들을 의식하다 보면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요. 한마디로 직장이 살벌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A씨를 불안케하는 것은 불투명한 회사의 장래. 경영행태로 보아 국내금융시장에 뿌리를 내릴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란다. “지점을 개설한다든가 경영 컨설팅이 필요할 때 절대국내 업체에 맡기지 않습니다.
죄다 본국 계열사나 이해관계가 있는 외국계 업체의 몫이지요. 스톡옵션요? 직원들에게는 한 주도 주지 않았어요. 회사의 관심은 오직 목전의 이익 불리기 뿐입니다”
결국 회사가 되살아나 자산가치가 불어나면 비싼 가격에 부분, 또는 전체가 재매각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이 회사를 인수한 곳은 주로 단기 차액을 노리는 투자펀드.
“언제, 어떻게 처지가변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몇 년후 청사진 같은 건 꿈도 못꿉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다 안되면 다른 일을 찾겠다는 생각이지요.일요일이면 창업 관련 서적을 뒤지거나 상담을 받으러 다니는 게 일이 됐습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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