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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2)카를 마르크스 대학 40호 강의실의 신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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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2)카를 마르크스 대학 40호 강의실의 신화<상>

입력
2001.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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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중순. 동베를린 바이센제 구역에 사는 동독 출신 작가 크리스토프하인을 방문했다.그의 집 앞 타소 거리엔 성홍열 같은 유다나무 꽃이 만개해 있었다. 배신자가롯 유다가 바로 그 나무에서 자결한 이후 나무는 각혈하듯 수많은 꽃을 토해냈다는데 유럽인들은 그것이 유다의 참회의 통곡이라고 믿고 있다. 유다나무는특히 부활절 이후 옛 동독 지역에 만개한다.

내가 그의 거실 갈탄 빛 소파에 앉자마자 하인은 지금 막 한스 마이어에대한 원고를 끝냈다고 했다. 옛 동독 지역엔 아직도 갈탄으로 난방을 하는 곳이 많다.

원고는 라이프치히의 일간지 폴크스차이퉁에 실릴 것이라고 했다. 하인은 마이어가라이프치히 명예시민으로 추대되는 6월9일, 제자 자격으로 그에 대한 강연을 하기로 돼 있었다.

원고 내용을 묻자 그는 파안대소하며 “누설할수 없다”고 했다. “마이어의 건강은 어때요?” 내가 물었다. “아주 좋질 않아요.” 하인이 대답했다.

하인에게 마이어의 건강을 물은 것은 이 칼럼을 위해 직접 그를 인터뷰 할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이어는 말년에 시력과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그 한스 마이어가 세상을 떠났다. 저명한 문학사가, 문학비평가, 역사가,소설가로서 20세기 독일문학은 물론 서양 지성사에 독특한 신화를 남긴 그는 5월19일 그의 생애 제3의 체류지인 독일 남부도시 튀빙겐 자택에서94세로 타계했다.

그의 죽음은 독일 언론이 그에게 보내는 극상의 찬사 “20세기 독일 최고 지성의 하나인 위대한 유럽인”의 퇴장, 그 이상의 의미를지닌다.

특히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추모기사에서 그를 “종신적(終身的) 이방인”이라고 명명한 것과 서독 문학비평의 대부 라이히 라니츠키가 그를 “우리가아는 이 시대 최고의 불행한 인간초상”이라고 확인해준 말 속에 마이어 신화가 지닌 눈부신 활력과 치열한 비극의 대극(對極)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의 신화는 한 유대인 지식인이 20세기 독일 역사라는 무서운 블랙홀을과연 어떻게 적극적으로 통과해내고 있는지, 또 한 인간이 집요한 희망의 보균자로서 어떻게 자기이념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으면서 장렬하게 자기신화를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경이의 흔적이다.

그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 대한 회상’이라는 부제가 달린 저서 ‘바벨탑’에서“동독은진정 독일 역사의 하나의 상처였는가”라고 도전적으로 묻고 있지만 사실 그 자신이 독일 현대사의 살아 있는 ‘내상’(內傷) 자체였다.

1907년 독일 쾰른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무려 한 세기를 살아오면서그는 생애 세 번의 정치적 망명과 동독 지식인들의 성지였던 라이프치히 카를 마르크스대학 40호 강의실의 신화, 그리고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정교하게모자이크된 현란한 명문들로 이루어진 5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들은 그가 94년간의 생애를 바쳐 싸워야 했던 역사적 용(龍)들, 즉 독일제국붕괴, 바이마르공화국, 히틀러의 제3제국, 제2차 세계대전, 독일 패전, 동독 국가 창설, 서독 망명, 동독 멸망에 대한 치열한 정신적 대결의기록들로 출렁거린다.

그는 자신을 검열하고, 염탐하고, 배신했으며 결국 서독으로 망명하게끔 내몬 조국 동독의 멸망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끝이 나쁘면 다 나쁘단 말인가. 동독의 멸망은 동독의종막극이 아니다. 그것은 통일독일이란 이름의 새로운 출구를 지닌 새로운 극의 시작을 의미한다.

동독 멸망과 함께 독일에서 중요한 유토피아의 한가능성도 함께 멸망해 버렸다는 인식에 이르지 않는 한 동독은 독일 역사 속에서 영원히 치료될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마이어의 신화를 장식하고 있는 비범한 광채의 근원은 동독 국가 창설 당시로부터시작된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패망하고 항복문서 서명이 끝나자마자 많은 지식인들이 속속 망명지로부터 소련 점령지역인 동독으로 돌아왔다.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미국에서,시인 요하네스 베혀가 모스크바로부터 도착했다.

마이어는 프랑스와 스위스 망명을 마치고 돌아왔다. 블로흐는 이후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명저 ‘희망의원리’의원고를 들고, 마이어는 망명지에서 쓴, 지금은 현대의 고전이 된 ‘게오르크 뷔히너론’의원고를 들고 귀국했다.

마이어의 이 저작은 전후 독일에서 출판된 최초의 문학비평서였다. 이 책은눈부신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공이 지금 독일 문단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인 ‘뷔히너 문학상’의기초가 됐다.

고향인 서독으로 가지 않고 동독에 온 이 당대의 지성들은 사회주의 이상국가건설에 대한 예언자적 정열과 갈증을 나누며 동독 초기의 지성사를 적어나갔다.

시인 브레히트는 그의 절정기 작품 ‘부코프비가’ 등을 토해냈고 베혀는 문화부 장관이 되어 국가이념의 수호자로 일했다. 블로흐와 마이어는 당시 동독 최고의 엘리트의 전당인카를 마르크스대학 교수로 초빙된다.

두 사람은 이 대학의 다른 지성들과 함께 당시 서독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프랑크푸르트학파를 형성했던 것과 같은 찬란한 지적 광채를 만들어냈다.

마이어의 독일문학 및 문화사회학 강의는 그가 서독으로 망명할 때까지15년간 카를 마르크스대학 40호 강의실에서 진행됐다.

15년 내내 그 거대한 강의실은 강의시작 두 시간 전 예외 없이 학생들로 만원이 된 것으로유명하다.

바하의 둔주곡 같던 늪지 도시 특유의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엄한 유리지붕과 대리석 기둥으로 된 이 역사적 장소, 40호 강의실에서그는 신생국 동독의 미래였던, 동독 5개 주로부터 몰려온 노동자계급의 새 엘리트들을 키워나갔다.

소설가 우베 욘존, 크리스타 볼프, 시인 폴커 브라운 등 기라성 같은 동독지성들이 바로 이 보고로부터 세공돼 쏟아져 나왔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도 카를 마르크스대학 40호 강의실의 신화를 흠모하고 있었다고, 마이어의 제자이며 그의최연소 조교였던 스위스 문학연구가 페촐드 교수는 전한다.

어느 날 마오는 중국 최초의 국비유학생 두 사람을 파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동무들, 동독으로 가시오. 마이어와 블로흐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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