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의 새 섹션인 ‘하이터치’ 를 광고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희 신문이 18일자부터 다소 낯선 이름의 이 섹션을 낸 이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게뭔 뜻이냐” 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진 않았지요. “터치도모르나요? 만지는 거 아닙니까? 하이 터치는 만지고 느끼자는 거지요.” 선문답처럼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터치(touch)’ 는 분명히 ‘만지다’ 라는 뜻입니다. 만지는 건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든물건이든 손길이 닿으면 느낌이 오지 않나요? 왜 ‘러브 이즈 필링, 러브 이즈 터치’ 라는 존 레논의 유명한 노래 ‘러브’ 도 있지 않나요?
하지만 좀 이론적으로 설명해 볼까 합니다. ‘하이터치’ 란 결국 ‘하이테크’ 에 인간의 체온을 입히자는 겁니다. 미국의 세계적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의 신간 ‘하이테크, 하이터치’ 를 빌면 이런 겁니다.
“하이테크는 분명 우리에게 편리성을 가져다 주었지만인간 소외와 정신적 가치의 상실,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인간은 기술혁신과 그것을 따라잡지못하는 사회변화의 격차 속에서 점차 균형감을 잃고 있다. 이제 하이테크의 중심에는 인간의 손길이 있어야 한다.
하이테크의 결실을 향유하면서 시와음악, 가족과 지역사회처럼 우리가 인간임을 축복하는 방식이 하이터치다.”
하이테크의 본질은 속도와 경쟁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은 자본입니다. 요즘 ‘느리게사는 것’ 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갈수록 속도경쟁에 내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저항일겁니다. ‘하이터치’ 란 바로 느리게 사는 정신과 맥을 같이 합니다.
햄버거(패스트푸드)보다는 장맛(슬로 푸드)이요, 폭탄주보다는 포도주이며, 재봉틀보다는 십자수입니다.
작년에 출간돼 지금도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라 있는 ‘느리게산다는 것의 의미’ 를 쓴 프랑스의 피에르 쌍소 교수는 “첨단 문명의 시대에서우리는 늘 빨리빨리 살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불행을 불러들이고 있을 뿐이다.
느림은 시간의 재촉에떠밀리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능력은 갖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사이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만남의 X축은 시간이고 Y축은 공간입니다. 저의세대에게 시간은 기다림이었고 공간은 그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청춘들은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가슴이 뛸 이유가 없습니다. 싸늘하게 식은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도 없습니다.
대문 앞 편지통을 매일매일 살펴 보며 애태울 이유도 없습니다. 목에 건 휴대폰은 “삘릴리” 하며 님이 어드메쯤 달려오고 있는지 가르쳐 주고, 인터넷을 켜면 e-메일은 24시간 365일 어디에 있든 전자파의 속도로소식을 주고 받게 해 주니까요.
휴대폰은 기다림의 애태움을, 인터넷은 그리움의 애틋함을 앗아간 평면의 시대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하이터치’ 는 ‘휴먼터치’ 입니다. “필이안 와” “필이통해야지” 이런 말들 자주 씁니다. ‘필’ 은 ‘교감’ 일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인터랙티브(interactive),즉 쌍방향입니다. 차가운 이성, 흑백의 논리보다는 따스한 감성의 교환, 창조적 영감의 원천입니다.
약속과 달리 ‘하이터치’ 에 대한 홍보가 되고 말았군요. ‘하이터치’ 는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터치하겠습니다. 전자메일보다는기자들의 체온이 느껴지는 육필원고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오감(五感)에서 나아가 육감(六感), 즉 마음의 눈, 영혼의 눈까지 고감도로 터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메말랐던 대지 위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회색의 도심을 달리며문득 무엇을 느낍니까? 장마가 걱정이라고요? 아니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도?
한기봉 문화과학부장 kib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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