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조정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성리학을 연구하는 데만 힘썼다.그는 지리산 자락에 묻혀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고 썼다. 지리산 아래서 살았던 황매천(黃梅泉)은 한일합방 후 망국을 비관한 절명시(絶命詩)에서 “산이 찡그렸다”고 말했다.
이성부(59) 시인은 일곱번째 시집 ‘지리산’(창작과비평사 발행)에서 이렇게 썼다. “창밖 달빛 아래 나무그늘이 아무래도 수상쩍다/ 그래도 사람 해치지는 않았어/ 없으면 그냥 가고/ 있으면 조금쯤 남겨두고 갔어”(‘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시인은 “사람 목숨 질겨 저리 허위적거렸다”며 살아남은 것을 탓하다가 “그래도 사람 해치지는 않았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시집 ‘지리산’은 5년 전부터 이씨가 쓰고 있는 ‘내가 걷는 백두대간’의 연작의 일부이다. 그는 남쪽 지리산부터 북쪽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걸어가 보겠다고 마음먹고, 토막토막 끊어서 산에 오른다.
그는 먼저 종주의 끝자락인 지리산을 오르면서 건진 시상을 한 권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다.
시인은 지리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소인배 들끓는 세상에서 몸을 숨긴 남명 선생을 보았고, 화엄사 아래 모래밭에서 쓸만한 자리를 알리던 도선국사를 만났다.
지리산에는 뱀사골 물살에 휩쓸린 고정희 시인도 있었고, 빨치산 청년들의 ‘비트’(비밀 아지트)도 있었다. 시인은 그가 기억하는 사람들을 지리산이 넉넉하게 품는 것을 깨닫는다.
“얼음 들어 검푸른 발가락 잘려나가도/ 스스로는 아깝지 않았던 목숨들/ 오늘은 단풍 물들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본다” (‘단풍이 사람을 내려다본다’)
시인에게 80년 5월은 여전히 짐스럽다. 그해 그는 신문기자였고, 고향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채 마르지 않은 신문 대장을 들고/ 군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곳을 드나들었다/ 노여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침묵임을/ 그때 나는 나에게서 배웠다” (‘광주’) 살아남은 사람은 “길이 가는 대로 혼자 걸어 임걸령까지 왔다.”
그는 오랫동안 걸어온 산길에서 뒤늦게나마 배운다.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80년 광주’라는 무거운 짐을 메고 오르는 산길에서 그의 어깨는 조금씩 가벼워졌다. 짐을 덜어낸 것은 아니다.
혼자 가는 산길 중 마음이 튼실하고 넓어졌기 때문이다. “부정 부패 부조리 지역감정 따위들/ 우리나라를 어지럽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어둠 속에 묻어버리는 저 큰 깨우침의 적멸(寂滅)이 엄숙합니다”(‘반야봉에 해가 저물어’)
^시인은 ‘문학이 가는 길’을 말한다. 그것은 산으로 가는 길과 같다. “편안한 길보다는 되도록 어렵게 가는 길목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감동을 만나게 된다.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거쳐 성취된 인생이 아름답듯이,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열매 맺는 문학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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