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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金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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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金九

입력
2001.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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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26일 독립운동가 김구(金九)가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향년 73세. 경교장은 현재 서울 종로구 평동 삼성 강북 병원 본관과 연결된 2층 건물이다. 1945년 11월에 귀국한 김구는 52년 전 오늘안두희의 총에 맞을 때까지 이 곳을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다.

경교장은 이승만의 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함께 해방기 건국 준비의 둥지였다.

김구라는 이름은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다.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 것은 1944년에 들어서였고 그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을 포고한 그 이듬해에 우리는 해방을 맞았지만, 김구라는 이름은 늘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남한 사람들에게 항일 독립 운동사의 이미지는김구라는 이름을 젖혀놓고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이봉창의 일왕 저격,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 폭탄 투척을 배후에서 지휘했고, 장제스(蔣介石)와함께 대일 군사 협력을 모색했으며,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해 본국 상륙 훈련을 실시했다.

김구는 1948년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남북 협상을 제창했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과 소득없는 정치 회담을 열었다.

그의 반탁 노선이나 정부 수립 불참이 반드시 옳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조국과 고스란히 일치시켰던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수평적 비교는 적절치 않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김구의 위치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드골이 지닌 위치와 닮은 데가 있다. 김구도 드골처럼 도저한 우익이었고, 드골처럼 좌익과의 협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구에게는 드골에게 있었던 정치적 운과 재능이 없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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