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글은 송ㆍ원나라의 글이 아니고 한ㆍ당의 글이 아니며 바로우리나라의 글인 것입니다. 마땅히 중국 역대의 글과 나란히 익히고 알려야 할 것이니, 어찌 묻히고 사라져 전함이없겠습니까.”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의좋은 글을 골라 엮은 시문집 ‘동문선’ 서문에서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ㆍ1420~1488)은 ‘동문선’ 편찬의 뜻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또 “비슷한 책이 더러 있었으나 빠지거나 흩어진 게 많아서 부족함이 많다”는 지적과 함께 “이에 우리나라 옛 글들을 종류별로 정리해 책으로 만들어 올리니 임금께서‘동문선’이라는 이름을 내리셨다”고 쓰고 있다.
동문선은 조선 초기 성종 9년(1478)에완성된 역대 시문집이다. 중국의 ‘문선’을 본따 편찬했으되, 우리나라 글을 모은 것임을 강조해 ‘동문선(東文選)’이라 했다. 우리 글이 중국 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고있는 것이다.
성종 때 나온 정편 133권과,이후 40여년간 쓰여진 시문을 추가로 엮어 중종 13년(1518년)에 낸 속편 23권을 합치면 156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여기에는 고구려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을 꾸짖은 ‘여수장우중문시’(與隨將于仲文詩)로부터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을 비롯해 고려의 김부식,이인로, 이규보, 이제현, 이곡, 이색, 조선의 권근, 정도전 등 500여 명에 이르는 문인의 글 4,302편이 실려 있다. 이 많은 글을 시(詩)ㆍ사(辭)ㆍ부(賦)등 글의 종류에 따라 55종으로 세밀하게 분류해 체계적으로 엮었다.
동문선 편찬은 왕명으로 7년에 걸쳐이룩한 국가적 사업이었다. 당시 홍문관(집현전의 후신으로 도서를 관리하고 왕에게 정책을 자문하던 기구) 대제학이던 서거정을 중심으로 노사신, 강희맹등 23명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성종은 세종과 세조 시대에 활짝꽃핀 조선의 문화를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동문선뿐 아니라 ‘경국대전’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고려사절요’ ‘악학궤범’ ‘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이 그 열매다. 제도와 문물을 정비해책으로 펴내는 이러한 작업은 요샛말로 표현하자면 국가의 문화 인프라를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동문선은 방대한 분량과 체계적 편집으로역대 문집 가운데 으뜸이자 후대의 전범이 됐다. 물론 비판도 없지 않았다. 선별 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부터 누구 글은 왜 빠졌느냐는 항의까지있었다.
서거정의 친구 최숙정은 요절한 동생의 시를 넣어달라고 부탁했다가 비난을 사기도 했다. 또 당시 신진 사림의 우두머리이던 김종직은 ‘동문선’이 작품보다 인물 중심으로 글을 골랐다며 따로 ‘동문수’(東文粹)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문선을 능가하는 문집은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 책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여러 번 인쇄 됐으며, 나라의 사고(史庫)에 귀중하게 보관됐다.
편찬을 주도한 서거정은 네 번 과거에급제하고 다섯 임금을 섬겼으며 육조 판서를 두루 지낸 인재였다.
경학과 문장에 능했음은 물론 천문ㆍ지리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어 임금이 언제나곁에 두고 지식과 조언을 구하는 ‘인간 백과사전’이었다.
성종은 그를 몹시 아꼈다. 그가 병들자 자신이 입던 따뜻한 옷을 주고 어의를 보냈으며 그가죽자 수랏상의 반찬을 줄이고 조회를 폐했을 정도였다.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한성판윤을지내기도 했던 그는 32년간 불암산 밑에 살다가 나이 50이 넘어서는 현재의 서울 송파구 방이동 지역인 몽촌토성 근방에 살았다. 성종이 그의 공을높이 평가해 몽촌 일대 땅을 하사한 것이다.
송파구는 그를 기려 방이근린공원에 그의 시비(詩碑)를 세우고 지난 18일 제막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뤘던 고구려, 백제의 옛일을 돌아본 ‘회고시’가 새겨져 있다.
그의 묘는 본래 방이동에 있었으나도시개발에 밀려 1976년 아무 연고가 없는 경기 화성으로 옮겨졌다.
이장 당시 대구 서씨 종친회장으로 직접 시신을 수습했던 서정표(87) 옹은“관을 열어보니 6척 장신이었다”고 전한다. 옛 사람으로는 드물게 180㎝를 넘는 큰 키였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웃 강동구도1989년 천호2동 동사무소 옆에 서거정 시비를 세웠다. 서거정이 몽촌으로 이사하기 전 옛날 광나루로 불리던 이곳에 살았음을 기려 광나루 풍경을노래한 그의 시 ‘광진촌서만조’(廣津村墅晩眺)’를 돌에 새기고 ‘강동예찬시비’라는 이름으로 건립했다.
서거정이살던 당시 몽촌이나 광나루는 뽕밭 천지이자 시원스레 툭 터진 시야에 한강과 멀리 아차산이 들어오는 곳이어서 그는 그 풍광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를여럿 남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와 빌딩숲, 자동차가 분주히 오가는 대로뿐, 그가 보았던 갈매기며 수묵화를 펼쳐놓은 듯한 아득한 풍경은만날 길이 없어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실감케 한다.
국역동문선은 1966년 양주동, 신호열 공동번역으로 처음 발간됐으며, 개정보완판이 1998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나왔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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