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리 발렌타인’ 첫 공연이 있었던 22일 오후, 서울 정동 제일화재세실극장 입구는 공연 한 시간 전부터 북적거렸다.212석의 객석이 가득찼고, 급히 준비한 12석의 보조석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표는 29일분까지 매진된 상태. 10년만에 무대에 서는 김혜자에 대한 기대감이다.
이윽고 무대가 전면을 드러내고 브래드 부인, 결혼 전 이름 ‘셜리발렌타인’ 김혜자가능숙하지만 감흥 없는 손길로 식사를 준비한다.
“벽! 너하고나 얘기를 해야겠구나.” 그렇게 처연한 넋두리가 시작된다. 때 되면 밥이나 하면서 무심하고 이기적인 남편과 자식만 바라보는 갑갑한 신세.
마치 ‘사랑이뭐길래’에서 남편의 호통에 움찔하던 ‘대발이 엄마’처럼, 초반 셜리는누구를 향해 폭발할지 모르는 불만이 켜켜이 쌓여 있다.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그는 관객에게 남편과 자식의 흉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다.
셜리는 여권운동가인 친구 제인의 권유로 깜짝 놀랄 일탈을 감행했다. 둘이서2주간 그리스로 휴가를 떠나는 것이다.
‘될 대로 되라지’라며 히스테리컬하고 발작적인 웃음을 쏟아내는 셜리. 이제 방아쇠는 당겨졌다. 무대는 에메랄드빛 파도가 넘실대는 그리스 해변. 날아갈 듯한 순백의 스커트를 입은 셜리의 뒷모습은탄성을 자아낸다.
멋진 남자도 만난다. “난 나와 사랑에 빠진 거야, 다시 살아난 내가 너무너무멋졌거든.” 이제 셜리에게는 소녀 같은 생기발랄함이 넘친다.
동작 하나하나가 잠자리 날개처럼 우아하고가뿐하다. 그는 짐가방만 공항 콘베이어벨트에 실어 보내고 그리스에 남는다.
남편에게 건네는 여유만만한 말투, “안녕하세요? 난 한때 당신의 아내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시 셜리 발렌타인이 됐답니다. 함께 와인 한잔 하시겠어요?”
두 시간 가까이 속사포 같은 대사로만 이루어지는 모노드라마이건만 한 편의 영화를본 듯 입체적이다.
김혜자의 유연한 연기 속에서 험상궂은 남편, 얄미운 딸, 막무가내인 아들 등 열 여덟 개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10년 동안 ‘한국의 어머니’로 갇혔던 브라운관에서 벗어난 그는 마치 귀기가 서린 듯, 한바탕 살풀이굿을 치렀다.
‘리타 길들이기’의 영국 작가 윌리러셀의 ‘셜리 발렌타인’. 중년 여성의 넋두리를 예리한 통찰력과 재치로 그려낸이 작품이 김혜자의 섬세한 연기로 다시 살아났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며 셜리와 혼연일체가 되었던 관객은 김혜자가 퇴장한 뒤에도 끊임없는 박수를 보냈다.
열기가 식지 않자 옷을갈아입으려던 김혜자가 다시 무대로 나왔다. 이 극장에서는 3년 만에 처음 있는 커튼콜이었다.
연출 하상길. 의상은 디자이너 이신우. 무기한 공연으로화~목ㆍ일요일 오후 3시, 금ㆍ토 오후 7시 30분. (02)736-7600
■"저 정말 못할 줄 알았어요"
무대 위에서 커보이는 배우가 진정한 배우다. 그는 그랬다. 엄청난 에너지와 카리스마로관객을 압도했건만 무대 밖에서는 놀랄 정도로 자그마했다.
그는 소녀처럼 설레는 모습에 기쁨과 안도감으로 가득했다. “저정말 못할 줄 알았어요. 무대 뒤에서 얼마나 기도했었는데요…” 연출자 하상길의 간곡한 권유, 그리고 멋진 작품이 마음에 들어 연극을 시작했지만 한두 번 후회한 게 아니다. 자다가도 일어나대사를 외우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도 느꼈다.
발성, 시선처리 등 모든 것이 TV와는 너무도 달랐다. “초등학생한글 배우듯 하나하나 다시 익혔다”는 김혜자. 연출가는 그를 ‘물같다’고 했다.
“감정을 10%만 빼달라”는식의 요구를 너무도 정확히 맞출 줄 아는 타고난 배우다. ‘브로드웨이 마마’ 이후 10년 만에 돌아온 무대에 스스로도 대만족이었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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