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군살과치장을 줄이면 문장은 검소해진다. 가슴을 덥히는 감동은 잦아들지만, 차가운 문장 위로 맑은 진리가 떠오른다.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66)의 작품집‘여자들은 기다림과 씨름한다’(문학동네 발행)에서 문장이 갖는 단단한 뼈의 힘을 경험할 수 있다.
‘여자들은 기다림과 씨름한다’는 빅셀의 대표작 ‘블룸 부인은 우유 배달부를 알고 싶어한다’와칼럼집 ‘스위스인의 스위스’를함께 묶은 것이다.
그동안 단편들이 간간이 소개됐지만, 빅셀의 두 작품집이 완역된 것은 처음이다. 국내 독자들에게‘책상은 책상이다’로잘 알려졌지만 빅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소설 모음 ‘블룸 부인…’이다. 일상의 단면을 따라간 짤막한 이야기 스물 한 편 속에서 빅셀은 현대인의고독을 전한다.
서너 쪽분량의 소설 ‘우유 배달부’에서블룸 부인과 우유 배달부는 쪽지로 대화한다. 대화 내용은 ‘버터가 떨어졌음’ ‘버터가 없었는데 계산에 넣었어요’ ‘죄송합니다’라는 식이다.
블룸 부인은 우유 배달부를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하지만, 배달부는 블룸 부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유 배달부가 알고있는 블룸 부인은 그러나 우유 2리터와 버터 100그램을 주문하는 ‘고객’일 뿐이다. 작가는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묘사하지만, 현대인의소통 단절은 아프게 새겨진다.
‘스위스인의 스위스’에서 빅셀은 칼보다 강한 펜을휘두른다. 그는 스위스의 병역 의무제도와 중립국가라는 문제,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치와 경제, 금권력의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전쟁을 치르지 않았지만 전시상황을 이용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스위스의 의회에서는 타협과 절충, 진정한토론이 없는 절차상의 민주주의만이 실행된다. 불합리와 모순에 대한 빅셀의 날카로운 지적은 스위스 뿐만 아니라 부조리가 존재하는 현대 사회 어느곳이나 적용될 듯 싶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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