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반도체쇼크’에 휩싸였다. 작년말이후 세계 반도체경기가 사상 유례없는 칠흙 같은 불황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반도체에 전신을 의지하고 있는 국내경제는‘오일 쇼크’에 버금가는 대충격을 받고 있다.가장 치명적 부위는 수출이다. 올 1~5월중 우리나라의 반도체수출액은 월평균 15억달러(전년동기 22% 감소).이 기간 동안 국제반도체 평균시세는 1년전 대비 65%나 곤두박질쳤다.
만약 세계 반도체가격이 1년전 수준만 유지했다면, 현재의 수출물량과 반도체품목구성을 전제할 때, 월평균 43억달러의 수출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란 산술적 결론이 나온다. 반도체 가격폭락에 따른 수출손실이 매달 28억달러에 달하는 셈이다.
수출부진 경기침체 증시불안 등 한국경제가 처한 곤경의 원인을 추적하다보면, 결국은 반도체로 대표되는 정보기술(IT)불황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한국경제는 손톱만한 크기의 반도체 칩 위에 업혀 있는 형국이다.
한국경제에서 반도체의 위력은 확실히 대단하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은 단일품목으론 최대인 260억1,500만달러(전체수출의15.1%)를 기록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기여율이 63.4%인 점을 감안하면, 실질성장의 10분의1은 반도체 수출의 몫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반도체와 전체 경기는 ‘동조화’할 수 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환란도 반도체와 무관치는 않다. 95년 40%에가까운 초고속성장을 했던 세계 반도체경기가 96년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자, 그해 우리나라는 230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내면서 달러유동성 부족을 야기, 이듬해 외환위기를 맞고 말았다.
반면 세계 반도체시장이 3년에 걸친 혹독한 불황을 벗어나 99~2000년 20%이상의 활황세로 접어들자,한국경제도 2년간 평균 10%에 육박하는 고성장을 구가했다.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한 올 한국경제는 ‘흉작’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반도체 경기회복 V자…U자…L자?
반도체경기는 꽁꽁 얼어붙어도 논쟁만은 뜨겁다. 지난해 가격폭락을 정확히 예고, 명성을 높였던 미국 월가의 애널리스트조나단 조셉은 심리적 가격 마지노선이 차례로 무너지던 4월 “이젠반등이다”는 예상밖의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자 모건 스탠리의 마크 에델스톤, 리만 브라더스의 댄 나일스 등 다른 애널리스트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 더 떨어진다”고 맞받아쳤다.
결과는 비관론의 판정승. 4월 이후에도 반도체가격 하락세는 끝없이 이어져 64메가와 128메가 SD램은 생산원가이하인 각각 1달러, 2달러 초반까지 떨어졌고 차세대 제품으로 기대를 걸었던 ▦256메가 SD램도 연초 30달러에서 6달러대 ▦램버스 D램은18달러에서 10달러안팎 ▦DDR조차 4달러 언저리에서 거래되고 있다.
지난주 128메가 SD램가격은 추가하락을 멈춘 채 2.35달러에서 횡보했다. 이젠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는 ‘바닥 공감대’가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언제 뜨느냐는 것. ‘이미 반등이 시작됐다’는 V자 전망(인포메이션 네트워크)도 있지만, 크게는 ‘하반기부터 천천히 회복될 것’이란 U자형(인텔, 반도체산업협회ㆍSIA)과 ‘침체가 길어져 내년 이후에나 기대할 만 하다’는 L자형(모건 스탠리)이 주류를 이룬다.
권위있는 시장조사기관인 데이터퀘스트는 “금년 반도체시장은 작년 대비 마이너스 17%(2,260억달러→1,880억달러) 후퇴하겠지만 내년 2,130억달러(13% 증가),2003년 2,650억달러(24%), 2004년 2,650억달러(31%증가)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하반기부터 기술적 반등은 시작되지만, 작년 수준을 회복하려면 2003년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 세계반도체시장의 가격폭락은 수급불균형의 결과다. 따라서 회복시점의 예측은 수요회복과 공급조정을 함께 고려해야한다.
반도체의 최대수요처는 PC(28%))다. ‘Y2K 특수’이래 깊은 잠에 빠진 PC시장이 살아나면 반도체값은 분명히 오르겠지만, 불투명한 경기상황에서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로 바꿀 기업, 자녀에게 최고급PC를 사줄 부모는 많지 않다.
공급시장은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상태. 수요가 부진하면 공급을 줄여 가격을 지지하는 것이 합리적 시장참여자의 태도이지만, 세계 어느 업체도 감산에 나선 곳은 없다.
메리츠증권 최석포 애널리스트는 “바닥은 보이지만 수급구조상 회복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현 국면이 6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세계반도체업계에서 몇 개 회사가 도태되는 대지각 변동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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