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이 재(齋)를 올린다. 격정적으로 흙을 내리치는 소리, 그리고 격렬하게 불이타오르는 소리. 이어 빙렬소리(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낼 때 유약을 바른 부분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가 맑고 청량하게 들려온다.완성된 도자기의 아름다운합창이다. 하지만 소리는 곧 불규칙한 리듬으로 바뀌고 도자기를 깨는 강렬한 파열음으로 프로그램은 끝난다. 짧은 기쁨 끝에 긴 고통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순전히 음향만으로 이루어진 실험적 라디오 다큐멘터리 ‘끝없는시도’. 기계물레가 아닌 발물레를 찾아 경기 지역을 헤집고 다니며, 아름다운 빙렬소리를 위해 몇번의 재녹음과 컴퓨터 프로그래밍까지 동원한 작품이다.
99년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2000년 프랑스 라디오 페스티벌 ‘소리창조’부문최고상, 제12회 한국 프로듀서상 라디오부문 ‘실험정신상’을수상했다.
현재 MBC ‘다큐멘터리 드라마 - 격동 50년’을맡고 있는 김승월(47) PD는 국내 라디오 다큐멘터리의 산 증인이다.
흔히 라디오 다큐멘터리 하면 ‘교통질서’ ‘자연보호’ 등 계도적인 주제와 권위적이거나 강압적인 어조를 떠올리기쉽다. 하지만 그는 대사 한 마디 없이 감동을 ‘들려주는’ 격조높은 다큐를 만들어내는데 전념해 왔다.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또하나의 작품이 93년부터 8년째 해오고 있는 시각장애인김광석씨의 육아일기 ‘찬울이의 크리스마스’이다.
김씨가 아들찬울(당시 7세)과 함께 서울 동구릉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소리, 찬울의 여리고 순수한 말소리를 낱낱이 담아냈다. 멀티미디어 세상에서 라디오만이표현해낼 수 있는 따뜻한 소리다.
“소리에는 감정이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어조와 호흡, 말과 말의 사이(pause)까지 잡아내야 합니다.” 20년 가까이 녹음기 한 대만 들고 현장을찾아다녔다.
현장음을 제때 포착하는 것 못지 않게 그 소리를 가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디지털 녹음 방식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이를 선도적으로차용, 그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폐차장의 금속파열음 등을 섬세하게 녹음했다.
사재를 털어 해외 자료를 수집하고 라디오 다큐멘터리 제작인들의 국제회의에도 열심히참가했다.
그 땀과 노력이 올해 초 발간한 책 ‘라디오 다큐멘터리: 라디오 재미있게 만들기’(커뮤니케이션북스 발행)에 집약됐다.
이 책은 현재 이 분야의 이론서로는 독일과 벨기에에서 나온 몇 권이 고작인 현실에서 값진수확으로 꼽힌다.
라디오는 TV처럼 ‘대박’이터지는 매체가 아니다. 게다가 다큐멘터리는 비교적 제작이 쉽고 인기도 높은 각종 사연소개 프로그램과는 달리 공이많이 들어간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방송가의 ‘메인스트림’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대중적이고 인기 높은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뤄야겠죠.” 그는 “하지만 내가 만드는 소리들이, 소수이더라도 그 가치를제대로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충분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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