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깊어지면 개념은 없어진다. 삶을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규정된 관념이 아니라, 그 너머 낯선 저마다의 벼랑길을 걷는 것이다.”소설가 전경린(39)씨의 작품 주인공들은언제나 생의 낯선 벼랑길을 걷는 자들이다. “그저 나인 채로 끝까지 가보고 싶어”라며 비바람 치는 아파트 단지를 염소를 끌고 나서는 귀기 어린 ‘염소를 모는 여자’의 주인공 윤미소가 그렇다.
불륜의뒤에야 “처음으로 머리 끝까지 피가운반되는 신선한 생기”를 느끼는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주인공 미흔도 그렇다.
그들은 자신을얽어매고 있는 생의 관습적인 틀, 일상이라 불리는 올가미를 풀어던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출’하려 하거나 ‘탈주’한다.
전씨가 새로 발표한 전작장편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생각의나무 발행ㆍ전2권)의 주인공 은령은 스물다섯살, 작가에 따르면 ‘심각하게 희망을 앓는 나이’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어머니가열다섯 살이 많은 양부에게 재가한 후 그 집에서 자란다. 이제 스물다섯이 된 은령은 떠나려 한다. 그 나이의 여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결혼해안정적 체제에 편입되는 여자와,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모진 여행을 떠나는 여자. 은령은 당연히 후자다.
소설은 바닷가 지방도시의 방송국에서일을 시작한 은령이 만나는 두 남자와의 이야기다. ‘생의 본질과, 본질적인 폭력과 도발과 관능을’ 보여주는 시를 쓰는 시인 문유경, 문유경의 친구로카페를 운영하는 돈많은 마흔세 살의 남자 이진이 그들이다.
많은 상처를 겪어 삶의 비애 그 자체인듯한 모습의 유경은 은령에게 서정과 아름다움으로,이진은 잔인할 정도로 육체적 욕망을 부추기는 남자로 나가온다.
유경과 이진은 바로 전경린 소설의여자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원시(原始)’의 소설적 전형이다. 도무지 일상의 관습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그들은늘 ‘신적인 시간이며 동시에 야만적인시간’을 갈구한다.
은령은 뭔가 더러운 것이 가득 차오른다는 생각이 들 때는 유경을 찾아가 그 품에 안기고, 속이 빈듯 공허해질 때면 이진을찾아 감각적ㆍ물질적 쾌락을 탐한다.
야성의 정념에 몸을 맡기고 일상저 너머로 뛰어내리기, 그 끝은 어디일까. 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은령은 유경이 자살했고, 양부와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서른이 된 그녀는 자신의 의붓동생을 키우며 살아간다. ‘평범한 것들이 조금씩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가끔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전언은 스토리나결말에 있지 않다. 전씨는 “세계가 잠든 사이에, 나무들이 걸어다니는 비밀스러운 기간에, 콜타르 같은 어둠 속에서 그네를 타려는” 나를 꿈꾼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런 욕망에서분출된 육체적 소설언어는 독자들로 하여금 ‘유리로 만든 배’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돌게끔 만든다.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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