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참여민주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참여연대 정관)”비판 및 감시 기능이야말로 시민단체의 기본적 존립근거. 불과 10여년 짧은 기간에 오늘과 같은 시민단체의 융성이 가능했던 데는 초창기 그들의 날 선 비판정신이 큰 몫을 해냈다. 하지만 요즘은 웬지 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명백한 권력의 시행착오나 정책의 난맥상에 대해서도 치열한 문제제기가 없을 뿐더러, 내부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비판의 날이 무뎌졌다
지난달 말 정국을 한바탕 뒤집었던 안동수(安東洙) 전 법무부장관의 ‘충성 메모’ 파문. 여당 내에서조차 인사 시스템을 문제삼고 나선 와중에서도 시민단체들 쪽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몇 개 단체가 달랑 성명서 몇 장 낸 것이 전부. ‘웬만큼 얘기가 되겠다’ 싶으면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전공’에 상관없이 온갖 단체들이 앞다퉈 뛰어들어 목소리를 높이던 이전에 비해 대단히 이례적인 양상이었다.
올해 초 민주당이 자민련에 의원을 꿔줘가며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도운 ‘민의(民意) 뒤집기’ 행태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심지어 지난해 의약분업 사태 당시에도 정부의 시행착오 부분은 외면한 채 줄곧 의약분업의 당위성만을 강변하는 바람에 “시민단체가 정권의 홍위병이냐”는 원색적인 비난까지도 들어야 했다.
“최근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 선거사범 수사, 공적자금 유용 문제 등과 관련, 정부와 권력에 대해 시민단체가 형식적 대응에 머물거나 외면하는 인상을 주고있다.”(연세대 유석춘·柳錫春 교수) “절차적 민주주의 훼손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등 정부 권력에 대한 비판 정신이 퇴색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서경석·徐京錫 집행위원장)
이는 시민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공감하는 대목이다. 주간 ‘시민의 신문’과 여론조사기관 ‘인사이트 리서치’가 지난 연말 시민운동가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3.0%가 ‘정부에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응답했고, 지난해 ‘미진했던 시민운동’ 항목에서도 의약분업 관련(11.3%)과 SOFA개정 촉구(5.8%)에 이어 국정감시활동(5.3%)이 세번째로 지목됐다.
경실련 박병옥(朴炳玉) 기조실장은 “친NGO적인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시민단체들이 ‘개혁성 정책 지지’라는 명분에 묶여 역할의 혼선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고, 한국 NGO학회 대표 김영래(金永來ㆍ아주대 교수)는 “정부와 일정한 선을 긋고 비판적 긴장관계를 유지해야만 시민단체의 존재 의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조언했다.
■목소리가 획일화한다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획일화하고 내부 비판 정신이 약화 되는 것 또한 시민운동 진영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정부의 새만금 개발과 관련, 시민단체들은 외부에 표출되는 이견이 거의 없이 일관되게 반대의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270여개 시민단체가 연대해 출범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도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적 합의없는 개발 반대’ 입장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새만금 사업은 그 규모와 효과로 볼 때 시행여부는 물론, 개발방법 및 절차 등을 놓고 다양한 견해와 입장이 갈릴 수 있는 사안. 실제로 경실련의 경우 내부적으로 농업위원회의 “무조건 반대는 곤란하다”는 이견이 노정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대운동에 동참 했다.
경실련 관계자는 “새만금 문제에 대해 내부 이견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시민 운동의 환경상 주요한 이슈에서 독자적인 이견을 표출하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털어 놓았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 서경석 공동대표는 “시민단체 내부적으로도 주류의 흐름과 배치 되는 의견이 거의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자칫 ‘왕따’ 당할 걸 걱정할 만큼 자유로운 발언이나 건강한 대화 통로가 많이 약화해 있다”고 토로했다.
경실련 이석연(李石淵) 사무총장도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 할 시민단체가 연대지상주의로 흐르는 것은 시대적 추세에도 맞지 않는다”며 “이견과 반성을 용인하는 다양성과 자율성을 시민운동 내부에서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공회대 조희연(曺喜·NGO학) 교수는 “지난해 의약분업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 듯 시민운동 단체가 연대만을 강조하다 보면 내부 비판과 성찰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며 “시민운동의 동질성에 대한 허상을 버리고 이념적 분화와 입장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시민운동 본래의 자유지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김경철기자
kckim@hk.co.kr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연대회의'에 기대半 우려半
올해 2월 출범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연대회의)는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등 이른바 ‘빅4’를 포함, 서로 성격과 활동방향이 상이한 270여개 단체들을 아우르는 최대규모의 시민단체 통합기구.
지난해 총선시민연대(800여개)가 보여주었던 시민운동의 연대 가능성을 상설 조직(가칭 개혁연대) 형태로 재현, 정치, 교육, 지방자치 등 각 분야의 개혁을 촉구하자는 취지. 하지만 경실련이 주축인 시민사회협의회(시민협)측이 “총선시민연대 활동은 포퓰리즘의 전형”이라며 “시민연대가 또다시 그렇게 꾸려질 경우 시민단체의 자율성과 자유정신이 획일화 할 우려가 있다”고 제동을 거는 바람에 출발부터 진통을 겪었다.
결국 ‘느슨한 형태의 연대’라는 형식의 절충안으로 봉합됐지만, 여전히 시민운동권 안팎에서는 개혁에 대한 운동역량 결집에 대한 기대와 운동 획일화에 대한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지은희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이남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등 25명이 공동대표를,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석연 경실련 사무총장·남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총장 등이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경철기자
■시민운동가 정.관계 진출 논란
시민단체들의 비판정신이 예전같지 않다는 지적들과 관련, 자주 거론되는 것이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정·관계 및 관변단체 진출이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전문성과 사회적 신망을 인정 받아 발탁된 만큼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와, “권력과의 유착 및 운동의 순수성 훼손이 우려된다”는 부정적 시각이 그것.
그러나 90년대 중반이후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현실정치 참여가 부쩍 늘면서 ‘출세하려면 시민운동을 해야 한다’는 농담까지 등장한 데서 보듯 시민운동가의 정관계 진출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매우 인색한 게 사실이다.
시민단체 출신의 관계 진출은 지난 문민정부 시절 경실련 간부를 중심으로 본격화됐다. 93년 정성철(鄭聖哲) 상임집행위원장의 정무 제1장관 보좌관 임명을 필두로 박세일(朴世逸ㆍ정책위원장)씨가 청와대 사회복지수석을, 이각범(李珏範ㆍ정책위원)씨가 정책기획 수석을 지냈다.
현 정부에서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김태동(金泰東ㆍ정책연구위원장)씨, 윤원배(尹源培ㆍ상임집행위원회 부위원장) 전 금감위 부위원장, 이진순(李鎭淳ㆍ재정세제위원장) 전 KDI원장, 김성훈(金成勳ㆍ농업개혁위원장) 전 농림부장관, 한완상(韓完相ㆍ통일협회이사장) 교육부총리 등이 대표적인 ‘경실련 인맥’으로 꼽힌다.
또 YMCA, 경실련, 참여연대 등 주요 시민단체 간부를 모두 거쳤던 김성재(金聖在) 전 정책기획수석은 지난 4ㆍ13 총선 당시 총선시민연대 낙선운동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정계진출도 활발하다. ‘원조 시민운동가’로 꼽히는 서영훈(徐英勳) 전 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는 지난해 초 민주당 대표로 영입돼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고, 한명숙(韓明淑)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민주당 전국구로 16대 국회에 입성했다가 여성부장관에까지 오른 케이스.
현역의원 중에서는 민주당 이미경(李美卿ㆍ여성단체연합)·김경천(金敬天ㆍ광주YWCA) 의원, 한나라당 김홍신(金洪信ㆍ경실련)·오세훈(吳世勳ㆍ환경련) 의원 정도가 ‘시민운동출신 그룹’으로 분류된다.
이밖에 YMCA 사무총장 출신의 강문규(姜汶奎)씨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장에, 환경연합 공동대표 이세중(李世中) 변호사가 정부정책평가위원장에, 경실련 공동대표를 지낸 변형윤(邊衡尹) 서울대 명예교수는 제2건국위 대표공동위원장에 임명되는 등 시민단체 지도급 인사 다수가 현 정부 들어 주요 관변단체에 포진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
환경연합 최열(崔冽) 사무총장은 “개별적인 현실정치 참여는 시민운동의 지평을 넓히기 어려울 뿐더러 시민단체를 정권의 ‘보충대’처럼 인식시킬 위험이 있다”며 “개혁세력의 조직적 정치세력화가 아닌, 개별적 정관계 진출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홍신 의원은 “그나마 이만큼의 정치문화 발전이 이뤄지기까지는 시민운동 출신자들이 역할이 컸던만큼 개혁적 인사들의 지속적인 정치권 진출을 기대한다”고 다른 입장을 밝혔다.
/노원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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