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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가뭄 원망 농약마신 農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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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가뭄 원망 농약마신 農心

입력
2001.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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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하늘이 남편을 빼앗아갔어요.”6일 전북 김제시중앙병원 장례식장에 농민 박명고(56ㆍ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씨의 영정이 걸렸다. 찾는 이 없이 향 연기만 자옥한 빈소에는 가족만이 눈물로 고인을배웅하고 있었다.

박씨가 쓰러져있는 것을 아내 이동례(48)씨가 발견한 것은 지난 4일 저녁. 논일을 마치고 안방에 들어가 보니 남편 입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옆에는 제초제 ‘그라목손’이 놓여있었다. 이씨는 남편을 황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다음날 새벽 끝내 이승의 끈을 놓고 말았다.

동지산리 이장김건희(58)씨는 “물이 없어 모내기를 못하는 심정은 농부가 아니면 모른다”며“성능 좋은 양수기만이라도 충분히 지원해주었더라면 목숨까지 끊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따르면 자기 논 6마지기와 국유지 논 60마지기를 빌려 농사를짓는 박씨는 사상 유례없는 가뭄이 석달째 계속되자 가슴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모내기는 반 밖에 못했고논은 타들어가는데 인근 만경강은 허연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수십 길을 파도 양수기에는 모래만 딸려오는 지경까지 됐다.

더욱이 박씨의 논은 대부분 천수답이어서 물 구경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1주일 전부터는 산 아래쪽 웅덩이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서 논까지20분을 지고 갔는데 붓자마자 갈라진 흙더미 틈 사이로 쭉 빨려 들어가버리자 가슴을 쥐어 뜯기도 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최근에는 “하늘에부끄러움 없이 농사꾼으로 떳떳하게 살아왔는데…”라고입버릇처럼 말해 비 한방울 주지 않는 하늘에 대한 원망을 토로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박씨의 처외숙모 박수월(60)씨는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네 남매를 데리고 고생 고생하다 20여년 만에 처음 자기 논을 마련하고는 논에서 밤 새도록 춤추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이제 살만 하니 가버렸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동네사람들은 뒤에 남은 아내 이씨마저 “모내기 못하면 나도 따라 죽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이씨를 말리느라 애를 태우고 있다.

최수학기자

s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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