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판소리. 입에 쩍쩍 달라 붙는 우리말로 가사를 엮고 소리를 짜서 틀을 갖춘 판소리는 음악 뿐 아니라 문학으로도귀중한 자산이다.판소리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ㆍ1812~1884)다. 역사는 그를 판소리 수호자로 기록한다.
구한말 중인 출신으로전북 고창 관아의 아전을 지낸 그는 나이 사십 무렵에 천석 농사를 거둘 만큼 부유했는데, 평생 근검절약으로 힘써 모은 재산을 판소리 진흥에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제멋대로 불리던 판소리사설을 적벽가,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수궁가), 박타령(흥보가), 가루지기타령(변강쇠가)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했다.
판소리사설의 빼어남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절실함, 비속함과 점잖음을 막힘없이 가로지르는 자유분방함과 더불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 말을희롱하는 솜씨에서 드러난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우리말이 많이 쓰이는가 하면 의성어나 의태어가 풍성하게 등장, 우리말의 보배를 담고 있는 창고와같다. ‘흥보가’ 한 구절을 보자.
“가얏고 둥덩둥덩, 퉁소소래 띠루띠루, 해적소리 고깨고깨, 북장단 검무치며 벼락소고 동골동골.” 악기 소리를 구음으로 표현하는 솜씨가 놀랍다.
신재효는전국의 소리꾼을 자기 집으로 불러모아 먹이고 재우면서 지도했다. 소리 선생으로 명창 김세종을 데려다 가르치게 하고 자신은 이론과 사설의 뜻, 연기등을 지도했다.
또 직접 지은 단가 ‘광대가’에서 소리꾼이 갖춰야 할 자질로 인물 치레, 사설 치레,득음, 너름새(연기)의 이른바 4대 법례를 제시, 판소리 이론의 기본틀을 잡았다.
이론가ㆍ 교육자ㆍ후원자의 역할을 모두 해낸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판소리 전승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었을까.
전북 고창의모양성(고창읍성) 입구에는 그가 살던 집 사랑채가 남아있다. 다섯칸의 초가지붕 툇집인데, 여기서 소리꾼을 지도했다.
동리 고택은 본래 2,000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열 네 칸 줄행랑까지 한 울타리 안에있었으나 일제시대에 다 헐리고 사랑채만 남았다.
다만 대문 안 동리가비(桐里歌碑)가 동리 고택의 옛모습을 짐작케 한다. 고창 사람들이 힘을 모아1984년 세운 이 검은 돌 에는 신재효가 지은 ‘자서가’(自序歌)가 새겨져 있다.
“고창읍내 홍문거리/두춘나무 무지기안/시내우에 정자짓고/정자겨테포도시렁/포도끄테 연못이라” (‘자서가’ 첫 머리) 울 안에시냇물을 끌어들여 사랑채 마루 밑을 통과해 연못으로 흘러 들게 했던 것이다.
문간에는 무지개 문처럼 덩굴진 두충나무를 심어 지체 높은 양반이라할지라도 몸을 낮춰야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양반이 아닌 중인으로서 평생 신분의 한계를 절감하며 민중예술인 판소리를 통해 자아 실현을 추구했던그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두충나무와정자는 없어지고 그가 중국에서 구해다 심었다는 버드나무도 지난해 죽어 말라 비틀어진 모습으로 마당에 누워있다.
뜰에 마른 연못이 하나 있는데,일제 때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가 판 것이다. 정자가 있던 본래의 연못 자리에는 판소리 박물관이 들어서 6월이나 7월 개관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한창이다.
소리를배우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사랑채 옆으로 1990년 12월 문을 연 동리국악당이 있다.
군 단위 국악당으로는 유일하게 고창군이 운영하는이 곳은 500석의 공연장과 연습실을 갖추고 있으며 국악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지하 연습실에서 어린이들이 북 장단에 맞춰 소리를배우고 있었다. 동리국악당의 이기창 소장(55)은 “여기서배워 올해 판소리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네 명이나 된다”고자랑하며 “한 20년 지나면 대명창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고창은이미 여러 명의 명창을 배출했다. 현대의 김소희 김여란 김이수에 이르기까지 고창 출신 명창이 10명이나 된다.
신재효 당대에는 내로라 하는 명창들이모두 그의 문하를 거쳐갔다. 서편제의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과 동편제의 박만순 김세종 전해종 김창록,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 등이 그의 지원과지도를 받았다.
신재효 문하에서 ‘끄슬려갖고’ 나와야 어전 명창(임금앞에서 소리 하는 광대)이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19세기 후반 소리판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유파를 떠나 판소리 전체를 장악한 인물은지금까지 그가 유일하다. 33년간고창문화원장을 지낸 향토사학자 이기화(67)씨는 “고창은판소리의 성지이자 본향”이라고 강조하면서“구한말 판소리 중흥의 본거지가 됐던 이 곳에 전국의소리꾼이 한데 모여 먹고 자면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판소리 전수관이 생기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것은 신재효가 자기 집에 차렸던 소리청의 부활이 될 것이다.
고창=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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