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 전의 일이다. 제3기 동양증권배 결승 대국이 대만 타이베이(臺北)에서 열렸다. 당시 소년기사 이창호와 일본에서 활약하는 대만 출신 린하이펑(林海峰)이 대국을 벌였다. 놀라운 것은 린하이펑에 대한 대만 사람들의 사랑이었다.공항에 오빠부대가 귀국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중을 나오는가 하면, 내로라하는 갑부들이 서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줄을 섰다. 막강 일본 바둑계를 평정했던 린하이펑은 말 그대로 ‘대만의 영웅’이었다.
왕리청(王立誠) 9단. 그에게서 린하이펑의 옛 모습이 보인다. 같은 대만 출신.어릴 때 일본에 건너가 바둑을 공부한 것도 같을 뿐더러 신사답고 부드러운 외모도 닮았다. 그러나 진짜 닮은 점은 그의 요즘 기세가 과거 린하이펑처럼 파죽지세라는 것이다.
현재 그가 보유한 일본에서의 타이틀은 모두 4개. 기성전, 왕좌전, 십단전,학성전 등이다. 이중 기성, 왕좌, 십단은 일본 타이틀 상위 7개 기전에 속하는 것. 일본의 권위있는 타이틀의 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 의미가 깊은 것은 이 3개의 타이틀을 한 동안 일본 기계를 대표했던 두 기사, 조치훈 9단과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으로부터 따냈다는 사실이다.조-고바야시 시대의 막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내린 셈이 됐다.
국제 기전에서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지난 해부터 국제 기전에서도 강력한 파워를 보이고 있는 왕 9단은 제2회 춘란배를 거머쥐었다. 현재 제3회 대회에서도 결승전에 올라 있는 상황. 준결승에서 한국의 조훈현 9단을 누르는 파워를 과시했다.
22일부터 3번기로 열리는 결승에서는 유창혁 9단과 맞붙는다. 현재 유 9단과의 통산 전적은 4승 2패로 단연 우세하다. 대회를 2연패한다면 왕 9단의 다음 목표는 ‘국제 기전의 패자’ 이창호 9단이 될것이다.
왕 9단이 린하이펑 9단과 닮지 않은 점이 있다면 대기만성형이라는 점이다.1958년 대만 난투(南投)시 출생. 올해로 43세이다. 13세인 1971년에 일본에 건너 가 가노 요시노리(加納嘉德)를 사사했다. 이듬해14세의 나이로 프로기사가 됐지만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81년 신인왕전이 처음이었다.
이후로도 계속 신통한 성적을 보이지 못 하다가 표면 위로 부상한 것은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던 1995년. 제43기 왕좌전에서 조치훈 9단을 3대0 스트레이트로 누르며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후 일본 바둑계를 휘젓기 시작해통산 31회의 우승을 챙겼다. 1999, 2000년 2년 연속 최우수기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힘이 세고 난전에 능통한 기풍, 무엇보다 상대의 기를 제압하는 승부욕이 왕9단의 특징이다. 그가 세계의 기계를 평정하고 또 하나의 ‘대만의 영웅’이 될 것인가. 바둑계의 눈길이 고정되고 있다.
왕리청 9단. 일본 바둑계를 평정한그는 이제 세계 무대 정복을 꿈꾸고 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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