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색가(獵色家)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그러나 1798년 6월4일 73세로 죽은 조반니 자코모 카사노바라는 이탈리아 사나이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다.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카사노바의 삶의 궤적은 전 유럽에 걸쳐 있었고, 그의 교제범위는 볼테르 루소 등의 지식인들에서부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예카체리나2세 등 군주들을 거쳐 예술가 배우 귀부인 천민 사기꾼 방탕아등 전계층에 걸쳐 있었다.
그는 또 사제 외교관 재무관 스파이 연금술사 배우 군인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틈틈이 감옥을 들락거렸다.
카사노바는 보헤미아의 둑스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사서로 쓸쓸히 죽었지만, 그가 이 성에서 파적 삼아 집필한 ‘내삶의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불멸화했다.
‘카사노바 회상록’으로더 잘 알려진 ‘내 삶의 이야기’는 한 자유분방한 개인의 엽색의 기록이면서 18세기유럽의 사회와 풍속에 대한 예리하고 섬세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카사노바라는 이름이 엽색의 대명사가 된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자칭 ‘여성들의시혜자(施惠者)’로서, 그는 모든 계층의 무수한 여성들에게 ‘헌신’했다.
친딸 레오닐다와 동침한 뒤, “아비가 되어가지고 딸하고 한번 자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는 썼다.
그 동침의 결과로 레오닐다는 수태를했고, 그래서 카사노바는 자기 외손자의 아버지가 되었다. 물론 이 사생아는 카사노바에게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모르는 그의 자식들이 유럽 전역에 무수히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사노바가 두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함께 잔 모든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다만 그 열정이 순식간에 식었을 뿐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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