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3세인 한국계 미국인 정모씨. 한미은행을 인수한 미국 투자회자 칼라일그룹 한국사무소에 근무하던 그는 친구들에게 이 메일로 서울 생활을 전했다.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침실 3개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으며, 여러 은행의 임직원들로부터 거의 매일 골프 저녁 술 등을 대접 받고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왕처럼 살고 있다’고 자랑했다.
왜 이 젊은이는 이토록 환대를 받았을까. 좋게 말하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한국적 풍토’ 때문이다.
특히 그는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외국회사 직원이다. 더구나 그를 접대하는데 쓰는 돈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소위 ‘공금’이다.
얼마를 쓰던 영수증 한 장이면 정산이 된다. 혼자 깨끗한 척 공식적으로만 대하다가 혹시 나중에 우리 회사가 불이익이라도 당하면 그 책임을 혼자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저 관행대로 하면 된다. 결국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아마 이런 생각에서 그런 접대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글로벌 스탠더드 관점에서 보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법과 제도보다는 개인적인 친소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불투명한 거래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점은 국민들의 의식 조사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얼마 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IMF 경제위기와 국민경제 의식 변화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의 49.3%가 매매 거래 고용계약 등 경제활동에서 ‘연고’가 ‘경쟁’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경쟁이 중요하다는 사람은 45.6%였다. 몇 %인가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가 급격히 바뀌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98년 조사에서는 경쟁이 더 중요하다가 57.1%, 연고가 42%였다. 2년 사이에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거래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IMF 이전인 96년 4월에는 경쟁 중요가 57%였다.
KDI 조사의 핵심은 IMF 경제위기 이후 겉으로는 각종 경제 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보다는 학연 지연 등 연고가 중시되는 ‘연고 자본주의’(Crony Capitalism)가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IMF 경제위기가 닥쳤을 당시로 돌아가 보자. 많은 사람들이 경제 주권을 빼앗겨 ‘6ㆍ25 이후 최대의 국난’을 맞았다고 자책하면서, 그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제기했다.
그 중에서 단지 외환이 부족해 겪는 위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이 한꺼번에 표출된 결과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특히 비효율적인 경제 제도 및 구조와 함께 전근대적인 경제 의식과 관행이 문제가 됐다. 그 결과 비록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지만, 이번 기회에 그런 문제점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일부에서 IMF 체제 진입을 ‘축복’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런데 KDI 조사는 이런 희망이 헛된 망상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한 20대 교포는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했다.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봉급이 삭감되는 등 수많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개혁을 했는데 오히려 퇴보했다니 무엇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연고가 더 중요시 된다는 것은 정실에 흐른다는 것이고, ‘네 편, 내 편’을 분명히 가른다는 이야기다.
특정 지역 편중 인사나 낙하산 인사 등은 지극히 작은 예에 불과하다. 이제 지연 학연 우선은 정치 뿐 아니라 경제에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요즈음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연고 우선’을 당연시여기는 분위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이번 KDI 조사는 이를 계량화한 것 뿐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내년에도 똑 같은 조사를 실시하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두렵기까지 하다.
이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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