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 지원아빠 읽어보세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 지원아빠 읽어보세요

입력
2001.05.29 00:00
0 0

창 밖을 두드리는 반가운 빗소리에 창을 열어 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살인범을 추적하는 중이라 숨 한 번 크게 내쉬기 어려운 현장감식반 사무실의 무거운 공기 속으로 그나마 청량한 바람이 섞입니다.정말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대지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듯 당신은 저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만남 속에 12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스스로의 목마름과 균열을 다스리지 못할 때마다 당신은 소리없이 적셔주는 비였습니다.

새벽에 느닷없이 울리는 벨소리에도 당신은 짜증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급한 지문감식에 호출돼 나가는 저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수고해. 여보. 꼭 잡을 거야. 힘내!”라는, 짧지만 굵은 당신의 음성은 캄캄한 새벽길도 무섭지 않게 했습니다.

번번이 퇴근이 늦어 따뜻한 저녁 한 번 제대로 차려주지 못하면서도 덜렁 방송통신대에 등록했는데도 그저 미소로 응원해주었습니다. 4년만에 받아든 졸업장이 저에겐 당신과 지원이, 지명이가 주는 사랑과 신뢰의 증표처럼 느껴졌습니다.

지원아빠, 우리 아이들은 이런 엄마를 두고도 대견스럽게 자랐습니다. 엄마노릇 한 번 제대로 못한 제가 경찰관으로 임관되자 세상에서 제일 멋진 경찰관이 돼야 한다고 했을 때 저는 아이들에게서 당신을 느꼈답니다.

제 욕심이 어디까지일까, 정말 아내로서 엄마로서 이렇게 해도 되는가 하는 번민에 시달리면서도 저는 또 일을 저질렀습니다. 주부의 몸으로 24시간 교대근무에 처참한 살인사건현장을 뛰어야 하는 현장감식반에 자청해 근무하게 됐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 반복되는 엄마의 부재를 아이들에게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여서 메워주는 당신에게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요. 당신의 사랑을 생각하기보다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앞섭니다.

안양천변의 그 냄새나는 지하배수로에서 6개월된 변시체를 감식하는데 몸이 약한 둘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프다며 엄마는 언제 올 거냐고 묻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저는 진흙탕 속에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지원아빠. 제가 지원아빠를 남편으로서 사랑하기 전에 인생의 동반자로서 존경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당신의 넓은 가슴과 그윽한 미소에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가냘픈 아내이면서도 밖으로는 당찬 전문직업인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당신이 잠든 머리맡에서 제가 진심으로 당신에게 드리는 속삭임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늘 부족한 아내가 애써 스스로를 위안해 봅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이 아이들에겐 산교육일 수 있다는 억지도 부려 봅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이메일을 보내주며 못 이기는 척 해주기도 한답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직업인으로서의 욕심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메말라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 마음을 적셔주는 단비가 있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지원아빠, 시원한 빗줄기가 땅에 닿는 소리며, 그 빗물을 헤치고 달리는 자동차 소리며, 정말 기분 좋은 소리들이 지금 제 주위에 가득하답니다. 당신도 듣고 있을 이 비의 음악소리에 일상 속에서는 차마 열지 못한 제 마음을 얹어 보냅니다. 지원아빠 사랑해요.

/김희숙(39)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현장감식반 순경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