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은 40대를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아는’ 때라고 노래했다. 그는 밖으로 터지지 않는 슬픔을 알게 된 마흔 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정희 시인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린다. 고인이 활동했던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과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하자센터)가 함께 마련하는 행사다.
6월8일 이화여대에서 추모 심포지엄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에게’를 개최하고 9, 10일에는 전남 해남의 생가를 방문한다.
추모 행사에서 고 시인의 혼을 불러내는 이들은 하자센터의 10대 소녀들이다. 시인의 선굵은 여성성이 10대 소녀에게 대물림될 참이다.
고씨는 “시인에게 시란 생리작용 같은 것”이라고 말했었다. 통로가 막힐 때 질식 직전의 고통에 시달리며 자유를 갈망하는 생리가 시의 힘이라고 믿었다.
그는 시집 ‘눈물꽃’(1986)의 후기에서 “나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정치 현실과 예술의 혼을 따로 떼어놓지 못한다”고 밝혔다.
고씨는 여성이었으며 기독교인이었지만, 이 두 가지 정체성을 현실에 대한 방패로 삼지 않았다. 그는 ‘여성’과 ‘기독교’를 검으로 들고 당당하게 세상으로 들어갔다.
성경의 아벨처럼 쳐죽임 당한 80년 오월의 영혼들을 애도하며 고씨는 ‘이 시대의 아벨’(1983)을 노래했다.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그는 모순된 시대현실에 침묵하는 것이 죄악이라고 부르짖었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러했듯 세상을 향해 외쳤다. ‘회 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이 시대의 아벨’ 중)
고씨는 또 여성을 ‘약한 자의 이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정신에서 강한 의지를 찾아냈고, 역사의 피지배자인 어머니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 인간세계 본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살고 죽는 뜻은/ 팔만사천 사바세계/ 어머니 품어주신 사랑을 나눔이라’ 고씨는 어머니가 부당한 역사를 회개시키고 치유와 화해를 이끄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겨레강물/ 어머니강물/ 서로 얼싸안고 통일주체 이루어/ 한반도에 열린 산천 굽이굽이 흘러갑니다’ (장시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중)
소설가 송기원씨는 ‘술자리에서 고씨의 노래를 듣고 살과 뼈를 불살라 태워 올리는 듯한 간절함에 가슴이 멍멍했다’고 회고했다.
고씨는 무녀가 신을 불러들이듯 노래하고 시를 썼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았다. 그는 광주 YWCA 간사, 가정법률상담소 홍보담당, 여성신문 편집주간 등을 맡았으며 세상을 뜨는 날까지 ‘또 하나의 문화’ 월례 강의를 준비했다. 그는 그날 밤 지리산으로 떠났다가 계곡 물살에 휩쓸려 숨졌다.
고씨의 유작시 ‘독신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섬뜩하게 드리워져 있다.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신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서둘러 데려간다고 했던가. 고 시인은 자신이 사랑한 신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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