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이야기, 실패한 쪽의 이야기도 중요하다. 강한 자의 논리, 성공한 쪽의 논리에만 빠지는 건 피해야 할 일이다.그들이 정말 약한 것인지, 약하다면 왜 약해졌는지, 지금 실패했다고 버려야 하는 건지는 약자의 논리를 알면 더 잘 알게 된다. 억울한 약자일 경우 다시 이기는 방법, 성공의 길까지도.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원 선임과장 김대호(金大鎬ㆍ38)씨는 다른 대우자동차 동료와 마찬가지로 몸 담았던 회사가 몰락하는 바람에 약자가 된 사람이다.
월급도 깎였고, 언제 구조조정으로 퇴출될 지 모른다. 그런 그가 며칠 전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라는 책을 써냈다.
그는 이 책에서 약자, 실패한 쪽에서 대우자동차의 몰락을 분석하고 회생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를 실패한 자라고 하는 건 그가 결과적으로 실패한 쪽에 줄을 섰다는 의미일 뿐이다.) 원고지 1,600장 분량인 그의 보고가 지금까지 나온 대우자동차 몰락과 회생에 관한 숱한 보고서 중 가장 생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이야기를 이 지면이 허락하는 만큼 전하기로 했다.
그는 책 머리에 “왜병이 몰려오는데도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는 관군을 기다리다 일어난 의병의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제목처럼 내용도 도발적이다.
_책에서 대우차 문제와 관련된 사람 중 욕을 안 한 사람이 없더라. 김우중씨는 물론이고 워크아웃 전후해서의 재경부 장관 등 관료와 은행가, 국내외 컨설팅 전문가, 경영학 교수, 그리고 노동조합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근거가 뭔가?
“대우차 문제는 채권단과 노조 중 누가 손해를 덜 보느냐를 두고 벌이는 이해 관계의 본질적 대립이 아니라 무지로 인한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이다.
이런 갈등이 계속되는 건 자동차와 자동차 산업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해법을 내놓은 컨설팅회사와 학자들, 역시 자동차를 모르면서 컨설팅 결과만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워크아웃을 결정하고 수행한 관료와 경영진, 그리고 경제논리를 모르는 노조의 강경 일변도의 투쟁 때문이다.
학자를 포함한 컨설턴트와 관료들의 진짜 죄는 자동차를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책임한 보고서와 정책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_그들이 자동차산업에 대해 모른다는 게 무슨 말인가.
“예를 들면, 자동차는 패션과 석유화학 중 패션에 가까운 산업이다. 사람의 손과 워크맨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석유화학은 최신 설비가 경쟁력을 보장하지만 패션산업은 최신 미싱보다는 디자인과 마지막 바느질이 경쟁력을 보장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설비보다는 노동자의 손끝에서, 적확한 시장을 찾아낼 수 있는 경영 능력에서 경쟁력이 나온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동차공장은 설비가 크고 좋아야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규모의 경제’논리에만 빠져있다.
김우중씨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을 키우기만 하면 자동차가 팔린다고 보고 무책임하게 투자를 한 측면이 있다. 그건 와이셔츠 장사에 어울리는 경영이지 자동차에는 맞지 않는 경영이다.”
_우리나라 워크아웃 시스템에 대해서도 비판이 심하더라.
“시스템보다 대우차에 대한 워크아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중환자도 보호자나 의사가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면 종종 살아 남는다.
그러나 대우차 워크아웃 당시 관료나 경영자는 자동차산업에 대한 지식도 없었거니와 대우가 자체적으로 살 길이 있는가를 연구한 흔적도 없다.
대우차라는 중환자를 살리기 위한 지식과 애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워크아웃이 뭔가. 부실기업을 회생시키자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대우차에 대해 해외매각이냐, 청산이냐, 단지 두 가지만 생각했다. 자동차와 자동차산업에 대해 내가 말한 것 정도의 지식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무책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업과 기업의 특성을 모르니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붓고도 부도가 난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이건 우리나라에 각 산업이나 개별기업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다. 그러니 외국사례만 보고 정책을 결정하게 된 것 아닌가.“
_세계 자동차업체는 미국 유럽 일본의 5~6개 초대형 메이저만 남고 모두 없어질 거라는 예측이 있지 않나. 현대도 망할 거라고 하는데 현대보다 못한 대우가 어떻게 살 수 있나?
“그것도 틀린 주장이다. 자동차산업은 앞으로 환경과 안전에 대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만 하는데 이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업체는 선진국의 메이저밖에 없으니 한국업체는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게 그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다시 패션산업과 비교한다면 비싼 고급 옷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그걸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환경과 안전을 최고로 고려한 자동차는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런 고급차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선진국 최상위 소득계층일 것이다.
5,000만대 수준인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모든 사람이 최고급차를 살 거라면 당연히 그 주장이 맞다. 하지만 고급차 수요는 겨우 몇 백만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모든 자동차 메이커가 그런 시장을 노리고 투자해야 한다는 건 옳은 주장이 아니다. 현대나 대우차 수준의 자동차 수요가 훨씬 많다.
30년은 그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30년 전 포니를 만들 때도 외국 사람들은 한국은 자동차를 만들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포니는 성공하지 않았나.
5~6개 업체만 남을 거라고 하지만 현대와 기아는 지금도 미국 수출이 늘어나고 있으며 가격도 전보다 잘 받고 있다.”
_그건 현대와 기아의 경쟁력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될 것 같다. 그러나 몰락한 대우차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 아닌가. 대우차에 경쟁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렇게 답하면 되겠는가. 망한 대우가 만드는 마티스는 현대의 아토스보다 열 배나 더 팔려 결국 현대가 아토스 생산을 중단했다.
마티스는 소형차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도 현지 소형차와 맞붙어 이기고 있다. 현대와 기아가 미국시장에서 틈새 수요를 찾았듯 대우도 틈새를 찾아낸 것이다.
현대는 미국에서 팔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었으니까 팔리는 것이고 우리는 마티스라는 경쟁력 있는 차를 만들었으니까 경차시장에서 현대를 이긴 것이다. 소비자가 찾는 차를 만들면 왜 팔리지 않겠는가.”
_앞으로 대우가 그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전보다 어려워졌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희망이 없다면 내가 잠도 안자고 이 책을 썼겠는가.
가장 급한 건 대우차의 잠재력과 자동차산업의 본질을 꿰뚫는 사람이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심정으로 경영을 한 번 해보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럴 경우 노조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GM과의 협상이 진전되고 있지만 얼마를 받을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는 1원에라도 팔아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혈세 22조원이 투입된 회사를 이렇게 넘기는 게 과연 온당한가.
경쟁력을 찾을 수 있는데도? 대우차 자체의 노력으로 시장가치를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대로 둬선 안 된다. 설령 GM과의 협상이 깨진다 해도 대우의 시장가치가 높아진다면 청산밖에 길이 없다는 무책임한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말 지금 대우에는 확실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_대우차 몰락과정에서 노조는 무엇을 잘못했나.
“대마불사론을 믿은 게 잘못이겠지. 설마 노조가 인력 구조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부도를 낼까라고 자신만만 해하다가 최악의 상황으로 오게 된 것 아닌가.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걸 노조간부들이 몰랐던 것이다. 경제논리를 몰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편법과 변칙 경영의 달인인 건 분명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사회가 제대로 감시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세계경영 매료돼 大宇입사
그는 서울공대 금속과를 졸업한 운동권 출신이다. 80년대 초반 두차례 구속됐다가 풀려난 후 서울 구로동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95년 운동권 동료들이 고시공부와 유학 등으로 분화할 때 대우가 표방한 ‘세계경영’구호에 혹해 회사원으로 변신했다.
“세계경영말고도 대우의 내부적으로 내건 ‘창조 도전 희생’이라는 구호도 나를 유혹했다. 그것들이 운동권의 정서와도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우가 몰락한 후 그런 구호는 부실 편법 변칙경영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대우차가 몰락한 과정과 회생가능성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 넉 달 만에 책을 내놓았다.
대우에 들어가서는 구매개발, 사양혁신, 품질개선 등의 업무를 보면서 자동차와 자동차산업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공대를 나왔지만 대우에 들어오기 전에는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대우에서 공부를 하면서 제대로 된 엔지니어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책은 현장에서 습득한 지식이 바탕이 되어 사실 전개가 논리적일 뿐 아니라 적절한 비유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자동차시장에서의 경쟁은 다윗과 골리앗이 벌이는 레슬링이 아니라 돌팔매로 새를 잡는 것’이라는 비유 같은 것이다.
레슬링이라면 다윗이 이기기 힘들지만 돌팔매로 새를 잡는 것이라면 다윗도 이길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얻은 인문학적 통찰이 이 책을 그나마 재미있게 쓸 수 있는 바탕이었다”고 말했다.
_책까지 낼 정도의 실력이라면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하려 하겠다?
“회사에서 나를 자른다면 현대에 원서는 내보겠지만 내 발로 먼저 찾아가지는 않겠다. 나는 대우차가 좋다. 아직 희망이 있다. 여기서 뼈를 묻겠다.”
그는 ‘리더십’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대우차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사회는 엔진은 좋은데 스티어링휠_핸들_이 나쁜 자동차다.
지도층이 방향을 제대로 못 이끄니 온 국민이 이런 고생을 하는 것 아닌가”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사회의 성장엔진이 꺼졌다는 기존 지도층의 지적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언제 우리에게 맨파워를 빼고 성장엔진이 따로 있었는가.
각 분야 각 층의 지도자들이 맨파워를 제대로 엮어 옳은 방향을 제시하면 성장이 왜 안되겠는가”고 말했다. 들을만한 대목이다.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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