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가정을 지키자는 기사들을 이 달 들어 자주 대한다.이런 기사때문이 아니더라도, 이혼 후 친권을 갖고 키우는 딸아이와 서로 다른 호주를 모시는 상태로(아이는 전 남편이, 나는 미국에 있느라 단독호주신청을 못해 나의 아버지가 호주다), 호주제 상의 법의 눈으로는 전형적인 깨진 가정을 유지하는 터라 우리사회에서 가정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가끔 생각하게 된다.
가정에 대한 사회통념상의 아이러니를 처음 느끼게 한 것은 ‘가정파괴범’이었다. 부부가 사는 가정에 침입, 강도짓을 한 후 부인을 성폭행하는 범죄인을 특수하게 분류해서 가정파괴범으로 부르고 80년대에는 이들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얼마전 부처님 오신날 사면복권에서도 이들 가정파괴범은 질이 나쁜 민생사범으로 분류되어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은 이들이 극형을 받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질 때 솔직히 나는 ‘뭐 이런 사회가 다 있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강도, 강간의 범죄를 저지른 것은 용서할 수 없이 나쁜 일이다. 그러나 그 행간에 깔린, 아내가 강간당하면 당연히 이혼으로 이어지고 고로 가정파괴라는 그 공식을 납득할 수 없었다.
사실 가족이 성폭력을 당했다면, 더 따뜻하게 감싸주고 그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나도록 돕는 게 가족됨의 일차적 도리이다.
물론, 성폭행의 상처를 당사자가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고 그 아픔을 같이 감당해야 하는 배우자도 많이 힘들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이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내가 성폭행 당하면 곧 이혼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키는 것은 아니다.
성적인 부분의 민감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이 의도한 화간도 아니고, 그냥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이다.
결국 결혼한 여자가 당한 강간과 이혼의 이 깊숙한 상관관계는 강간, 더럽혀짐, 아내로서의 가치절하 또는 자격상실의 논리이고, 여자의 순결성이 폭력에 희생된 인간의 아픔보다 우선해도 좋다는 것을 가정에서, 법정이, 그리고 여론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가정파괴라는 말도 그렇다. 결국 이혼이 가정파괴라는 이야기인데, 만약 상대방이 당한 성폭력의 고통을 고통 그 자체로 감싸 안지 못하고, 아내로서의 자격상실, 온전한 성생활의 장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남편에 의해서 주도된 이혼이라면 가정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뼈아픈 행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혼이 만능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혼은 가정파괴라는 이 단순논리 속에 함축된 의미는 위험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정폭력 발생률이 30%선이라고 한다(문화일보 2001.5.18).
가정은 일상생활을 오랫동안 같이 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나 힘이 미치기 어려운 그 공간이 폭력적일 때 개인이 받는 상처는 더 깊고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가정의 외형의 틀이 유지되면 가정을 지키는 것이고, 그 틀을 해체하고 다른 틀을 만드는 것은 가정파괴라고 믿게 하는 논리적 함정이 여기에 있다.
가정을 이야기할 때 틀거리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우리가 만들고 지켜야 할 것은 개인의 이기심이나 경쟁심 그리고 돈의 가치가 전횡하지 않아서 가정 밖보다는 인간의 약함을 제대로 돌봐주는 공간, 육체적 정신적으로 폭력적이지 않고 서로의 독특함을 존중하고, 민주적인 질서나 가족이 아닌 타인, 나와 다른 성, 인종, 계급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정이 아닐까.
틀거리만 보면서 함부로 깨진 가정이라는 흉터를 법적으로 만들고, 열심히 내용 있는 가정을 만드는 사람을 상처 입히는 호주제의 폐지가 그래서 더 절실하다.
권인숙ㆍ 미 사우스플로리다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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