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재봉틀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작가 작업실에 재래식 재봉틀이라니. 3대의 최첨단 사진 현상기 속에서도 전혀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폼이 큰 쓸모가 있는 듯이 보였다.재봉틀만이 아니었다. 책상 위에는 연필로 그린 인체 데생이 여러 장 놓여있고, 한쪽에는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많은 책과 서류가 가지런했다. 현상기와 암실, 길게 늘어진 필름만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작업실로 착각할만한 풍경이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구본창 스튜디오. 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구본창(48)씨의 3층짜리 작업실은 '사진작가 작업실은 이럴 것'이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기계로 단순히 포착한 사진'대신 '만드는 사진'을 중시하는 그의 작업 때문이다.
"재봉틀 보고 놀라셨죠? 캔버스보다 깊이가 없는 인화지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인화지를 여러 장 꿰매기 시작했죠. 때로는 겹쳐서, 때로는 길게 이어서.
조선시대 아낙네들이 조각보를 만들 듯 꿰매고 또 꿰맸습니다. 이 작업에는 또한 커봐야 1㎙를 간신히 넘는 인화지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욕구도 작용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남자 누드 사진이 '태초에'연작이다. 6월 24일까지 서울 로댕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재봉질을 하고 남은 실은 그대로 작품 위에 늘어뜨렸는데, 인체에 상처를 낸 듯한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운명과 인연의 질긴 끈'이라는 이미지도 괜찮았다.
그는 국내 사진작가 중 가장 잘 알려진 편이다. '서편제''태백산맥''축제'등 임권택 감독의 영화 포스터 사진은 그가 도맡아 작업했다.
'에스콰이어'등 유명 패션 카탈로그도 10여년 동안 제작했다. 일부에서는 '상업적 행위'로 폄하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저 재미있어서 한 일입니다. 대중과 만나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죠."
현실이 갑갑하거나 창작 에너지가 떨어질 때면 훌쩍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1주일 두 차례 계원조형예대에서 강의, 12월 뉴욕 전시회를 위한 준비작업, 판매를 위한 사진 인화작업 등 빠듯한 일정이다.
지난 해 10월 이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아직 이삿짐도 다 풀지 못했다. 독신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자신에게만 모든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루하루다.
"사진촬영은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만 합니다. 물론 지하 스튜디오에서도 인물이나 정물 촬영은 하지만 주 작업은 여행 길에서 이뤄집니다.
낯선 곳에서 작품의 모티프를 발견하고, 이를 작은 카메라에 담아 옵니다. 그래서 괜찮은 이미지임이 확인되면 제대로 장비를 갖춰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것이죠."
전남 진도의 한 시골집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 넝쿨('화이트'연작), 일본 교토(京都)의 한 사찰 벽에서 느낀 회색 하늘 이미지('시간의 그림'연작)는 이 여행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들이다. 그의 작업실은 여행 길 따라 어디든 펼쳐져 있었던 셈이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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