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스타일을 고집할 것인가. '수취인불명' 에는 김기덕 감독의 그런 고민이 보인다.소외된 인간들의 억압과 욕망을 '엽기 혹은 잔혹' 으로 표현하는 그의 B급 영화들은 분명 '마니아적' 이며, 그가 "반추상적" 이라고 말하는 미학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로 끝나는 서사는 분명 김기덕 스타일을 구축했다.
'악어' 로 시작해 '섬' 까지. 김기덕 감독이 줄기차게 집착해온 것은 밑바닥 인생들의 소통과 구원의 문제였다.
한강에 투신 자살하는 사람들의 지갑을 터는 사내('악어'), 창녀('파란대문'), 아내를 죽이고 도망친 남자와 세상과 단절된 낚시터의 여자('섬')는 그것을 위해 몸부림친다.
김기덕 영화가 자극적이고 때론 끔찍한 이유는 그 몸부림이신체적 자학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자극적이면서도 슬프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할리우드 상업 영화의 기법을 차용한 다른 한국영화처럼 세련되지 못하다.
계산이나 매끄러운 연출보다는 밑바닥 인생들이 툭툭 내뱉는 욕설이나 휘두르는 주먹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해 간다.
저예산 영화가 가지는 운명이기도 하지만, 이런 고집을 그는 언젠가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식"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김기덕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대중과의 편안한 만남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김기덕이라고 모를 리 없다. 대중과 타협 모색이 처음이 아니다. 창녀와 여대생의 소통문제를 다룬 '파란대문' 에서 그는 능숙한 카메라 움직임과 감상적인 자세로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현실 비껴가기와 동화적 몽상으로 '파란대문' 은 김기덕의 색깔을 잃어버렸다. '수취인불명' 은 거기에서 한걸음 나아간 대중과의 타협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상업영화로의 길을 모색하는 방식. 그것은 강한 역사적 비극성 속에서 인간들의 절망의 표현이었다.
'수취인불명' 은 한국 현대사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다. 1970년대 미군기지 주변 작은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창국(양동근)이란 혼혈 청년과 양공주였던 그의 어머니(방은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버지를 찾아주려, 언젠가는 미국으로 갈수 있다는 희망에 수취인 없는 편지를 줄기차게 보내는 어머니나 그런 어머니의 행동을 무참히 뭉개버리는 창국 모두 '희망' 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몽둥이로 개를 때려잡는 어머니의 애인인 개장수 개눈(조재현)의 악다구니 역시 희망과는 무관하다.
영화는 한쪽 눈을 잃은 여고생 은옥(반민정)과 고교를 진학하지 못한 지흠(김영민)의 순수한 사랑마저 지켜주지 못한다. 상처와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은옥에게서 성적 욕망을 채우는 미군조차 지금의 현실에 괴로워 한다. 여전히 김기덕은 그 아픔을 극단적인 육체손상으로 표현한다.
아버지의 문신이 새겨진 어머니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창국, 수술로 고친 한쪽 눈을 다시 원래 상태로 돌리는 은옥, 창국의 죽음 후 자살하는 어머니.
김기덕 감독은 '수취인불명' 으로 다시 희망 없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 현실은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시대성을 가졌고, 그러면서 여전히 극단적 비극성을 가졌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좀 더 대중적라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의 영화는 짜임새가 부족하고, 단조롭다.
그것을 강한 표현으로 가리기에는 '수취인불명' 은 곳곳에 허점이 보인다.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라는 말은 김기덕에게는 더 이상 변명이 안 된다. 이미 그는 그 길을 오래 전에 선택했기 때문에.
이대현 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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