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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연화의 죽음, 궁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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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연화의 죽음, 궁예의 죽음

입력
2001.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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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자기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균형이 잡히고 공정할까. 요즘 TV드라마 '왕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태봉의 황제인 궁예는 왕건의 반란으로 옥좌를 잃고 이번 주말 방송에서 죽게 된다는데, 그의 죽음이 벌써부터 장안의 화제가 되어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제작진은 궁예가 영웅답게 죽도록 배려하여 가슴 뭉클한 마지막 장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웅답게 죽도록 배려했다'는 것은 사기(史記)의 기록과 다르게 궁예의 최후를 각색했다는 뜻이다.

1145년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왕이 미복 차림으로 산속에 도망쳤다가 백성들의 손에 죽었다"고 적혀있고, 1451년 편찬된 고려사에는 "왕이 도망쳐 이틀 밤을 지내고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백성들에게 죽었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제작진은 승자의 입장에서 쓴 이 기록들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고, 영웅적인 생을 살았던 궁예가 백성의 보리를 훔쳐먹었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그 기록을 따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삼국사기에는 없던 "보리이삭을 훔쳐먹었다"는 기록이 3백년 후 편찬된 고려사에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을 믿기 어렵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또 역사적인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고 해석하려는 작가의 노력을 무조건 '역사왜곡'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연화의 죽음과 궁예의 죽음에서 드러나는 불균형과 모순이다.

연화란 이름은 작가가 붙여준 이름이고 사서에는 강비(康妃)로만 나오는데, 아내의 부정을 의심한 궁예가 "불에 달군 쇠 방망이로 음부를 쳐서 죽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의 죽음 역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참혹하게 각색되어 고려사에는 '3척 쇠 방망이' 등으로 잔인한 묘사가 나온다고 한다. 궁예는 아내에 이어 두 아들까지 죽였다.

제작진은 연화의 죽음을 기록대로 다뤘다는 점에서 궁예의 죽음을 다룬 태도와 구별된다.

배려가 있었다면 연화가 처형될 때 황금색 비단 막으로 앞뒤를 가려준 정도인데, 그것은 왕비의 품위를 지켜주기 위해서 라기 보다 공영방송임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비의 비명소리에 이어 황금색 비단 막 위로 연기가 피어 오르고, 막을 치우자 죽은 왕비의 모습이 드러났다. 앞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왕비의 치마가 그가 받은 형벌을 설명해 주었다.

강비가 기록대로 죽었다 해도 그것은 강비의 치욕이 아니라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른 궁예의 치욕이다. 왕비는 폭력의 희생자일 뿐이다.

그러니 왕비의 치욕적인 죽음을 묘사하여 품위를 훼손했다고 유감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왕비의 죽음에서는 방영하기 부적절할 만큼 잔혹한 기록을 사실로 묘사한 제작진이 폭군의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기록을 무시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때 '영웅'이었던 사람은 나중에 무슨 짓을 해도 계속 영웅인가. '관심법'으로 수많은 백성을 죽이고, '북벌'에 미쳐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그토록 흉악하게 아내와 아들들을 죽인 폭군이 반드시 명예롭게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그 영웅은 인격파탄 상태인데 이틀을 굶고 나서 보리이삭을 훔쳐먹은들 무엇이 이상한가.

연화에게 냉정했던 제작진이 궁예에겐 왜 그토록 마음을 쓰는가. 절대권력을 휘두른 폭군을 위해 계속 권력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구멍뚫린 치마를 입은 채 수천만 시청자들 앞에서 죽어있는 연화, 그 기구한 왕비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가 단지 여자여서가 아니다.

연화는 수많은 '배려받지 못하는 희생자'들의 이름일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왕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드라마가 다룬 연화의 죽음과 왕건의 죽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천년전의 역사를 다룬 것이지만, 오늘의 역사에서도 살아 숨쉬는 교훈이 될 수 있다.

발행인 msch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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