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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인 이렇게 산다] (15)20살 그들만의 성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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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인 이렇게 산다] (15)20살 그들만의 성년식

입력
2001.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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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공식성년되는 서강大 최재웅 군"가! 가란말이야, 다시하겠습니다!"

성년의 날을 4일 앞둔 1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S 연기학원 스튜디오. 갈색 단발머리의 한 청년이 카메라 앞에 서서 모 음료 CF에 나오는 대사를 수백번째 반복했다.

편안한 운동복 차림의 이 청년이 빛나보이는 것은 잘난 얼굴이나 밝은 조명 때문만은 아니다. 4시간째 똑같은 대사만 반복하는 지루한 연습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다시할게요"를 스스로 외치는 그의 굳은 의지와 자신감 때문이다.

연기지도 선생님마저 두손 들게한 이 '의지의' 주인공은 최재웅(崔在雄ㆍ20ㆍ서강대 자연학부2)군. 지난해 4월 '극(極)에서 극(極)으로 2000'이라는 국제 탐험프로젝트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7개국 8명의 청년 탐험대원들과 함께 북극점을 출발, 올 1월1일 남극점을 정복한 바로 그 청년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한과 고난을 이겨내고 271일간의 강행군에 성공,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심어준 최군은 올해 21일 '공식 성년'이 된다.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삶을 스스로 책임 져야 하는 때가 시작된 것이죠. 때로 외롭고 불안하지만 제 인생을 직접 설계한다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즐겁습니다."

'인생'이란 말이 나오자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 최군이 선택한 미래는 '최고의 연기자'가 되는 것. "왜 하필 연기자냐"는 질문에 최군은 "이유가 중요한가요?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은지를 물어봐주세요"라고 당돌하게 답한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고 막연히 배우를 지망하는 건 아니에요.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돈이나 명예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요."

서울 세화고 재학시절 이미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최군은 고3때 연극영화과에 가겠다고 했다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몇 달에 걸친 '투쟁' 끝에 아버지(최승훈ㆍ崔承勳ㆍ연세대 의대 교수)에게서 "일단 일반학과에 진학하면 무엇을 하든 상관 않겠다" 는 타협책을 끌어냈다.

학창시절 내내 공부와 담을 쌓다시피했던 최군은 "몇 개월간 공부해 수능성적도 올리지 못할 의지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하는 의지로 학업에 매달린 끝에 1999년 3월 서강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막상 남들이 '알아주는'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학교 밴드부 활동, 미팅 등 캠퍼스의 낭만에 흠뻑 빠져 연기자의 꿈은 차츰 멀어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탐험을 인도하며 동행한 영국인 탐험가 마틴 윌리엄스(55)를 만나면서 연기자의 꿈이 뒤늦게 되살아났다. "꿈을 좇지 않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던진 그의 평범한 한마디에 연기자의 길을 가야겠다는 용기와 의지가 솟구쳤다.

이후 탐험기간동안 작성한 '미래 설계도'를 가슴에 품고 1월말 귀국한 최군은 본격적인 '꿈 좇기'를 시작했다. 3월에 모 연예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마친 최군은 4월초 연기학원에 등록한 뒤 밴드부 등 주변정리에 나섰다.

"감정 이입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사귀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 "배우에게 대학 간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연기자가 되는데 정말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기 위해 올 수능에 다시 응시할 계획입니다."

하루 9시간씩 이어지는 연기 수업이 고되고 힘들때마다 영하 40도의 추위와 싸워 마침내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의 벅찬 희열을 떠올린다. 최군은 최근 체중이 3kg이나 빠졌다.

최군은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2만4,000km의 세계일주를 이뤄냈듯, 지금의 작은 노력이 모이면 언젠가 최고의 연기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라며 이마에 송글 송글 맺힌 땀을 닦아낸다.

"내가 네 여동생을 농락한 파렴치범이라고 가정하고 나한테 한껏 소리를 질러봐"라는 연기지도 선생님의 지시에 "전 여동생이 없는데 어떡하죠?"라고 엉뚱하게 답하는 '연기 초보' 최군.

스스로 선택한 인생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최군의 모습에는 개성파 연기자의 가능성이 스며있는 듯하다.

"'너를 무조건 믿는다'는 부모님의 한마디가 성년의 날 최고의 선물이 될 것 같아요. 부모님이 이제 저를 정말 '어른'으로 인정해주신다는 뜻이니까요.

최문선기자

moonsunn@hk.co.kr

■이상진, 서주범 군 삶

"실패해도 후회는 없다."

올해 성년이 되는 그들은 독특한 삶의 방식이 유일한 무기다. 아직은 많은 것이 서툴지만 험한 세상에 한땀 한땀 자신의 꿈을 수놓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뮤지컬배우를 꿈꾸는 20살 이상진(李相珍ㆍ서울 강남구 논현동)씨의 하루 수면시간은 고작 2시간. 늘 부시시한 모습에 피곤한 표정이 역력하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하다.

대전에 있는 부모의 품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씨가 뇌리에 새긴 좌우명은 '잠은 사치'.

오전 8시부터 시작되는 연기 학원의 강훈련은 오후10시에야 끝난다. 이씨는 지친 몸을 가눌 겨를도 없이 월셋방 근처 PC방으로 향한다. 오전1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편하게 잠만 자고 있을 순 없잖아요."

그는 이렇게 해서 생활비와 50여만원의 학원비를 마련한다. 소속사와 매니저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버티고 있지만 후회는 없다. 이씨는 "가끔 지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다시 힘이 난다."고 말했다.

올해 초 대학을 휴학하고 밴드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서주범(徐周範ㆍ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도 며칠 후면 어엿한 성년이 된다.

인디밴드 '네바다51'의 기타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서씨의 연주경력은 고작 15개월.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독학과 어깨너머로 시작한 기타 연주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경력 3~4년차로 인정 받는다. 그 비결은 말 그대로 '될 때까지 하는 것'이다.

"밤새 기타와 씨름하다 보면 밤을 새기 일쑵니다. 손가락 마디가 부르트고 어깨에 감각이 무디어지는 고통도 막상 어려운 부분을 성공하고 나면 금새 잊어버립니다."

덕분에 그가 소화할 수 있는 장르도 발라드부터 하드코어까지 다양하다.

서씨 또한 생활비는 기타학원 조교, 공연기획 및 섭외 등 아르바이트를 통해 해결한다. 그는 "한달 25만원의 빠듯한 돈으로 견디고 있지만 기타와 함께라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정해진 길을 마다하고 '개척'과 '독립'을 꿈꾸는 이 시대 20살은 '잠을 잊은 채 될 때까지'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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