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전세계 이동통신 장비업체의 눈길이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한꺼번에 쏠렸다.중국롄통(中國聯通)이 중국대륙 14개 지역에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통신망을 구축키로 하고 장비 입찰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각축 끝에 삼성전자를 비롯해 미국의 모토로라, 루슨트 테크놀로지, 스웨덴의 에릭슨, 캐나다의 노텔, 중국의 중싱(中興) 등이 한번에 총 25억 달러 규모의 장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거대한 중국시장은 언제나 기업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13억 인구에 물건 하나씩 팔면 그 돈이 어디냐"는 말은 제국주의 시대 뿐아니라, 이번 CDMA 입찰에서 도 그대로 통용됐다.
하지만 중국을 그저 물건을 팔기 위한 나라로 여기는 것은 오산이다. 다국적 기업들의 봇물 같은 투자 덕으로 중국은 이미 '생산' 대국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1990년대 말부터는 각 경제 특구에서 정보기술(IT) 산업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하면서 '신경제'의 강국으로 발돋움할 태세다. 'IT 중국'을 열어가는 선두 대열에는 베이징의 중관춘(中關村)이 있다.
"중관춘은 10년 안에 대만의 신주(新竹) 반도체 단지를, 20년 내에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따라 잡을 것이다."
99년 6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이 같은 장담과 함께 중관춘 개발은 시작됐다. 江 주석이 중관춘 일대를 IT 개발의 핵심으로 지목한 것은 베이징대, 칭화(淸華)대, 중국과학원 등 최고 두뇌가 이 지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전자상가를 중심으로 컴퓨터 하드ㆍ소프트웨어 유통이 활발한 점도 작용했다.
江 주석의 발언 직후 중국 국무원은 베이징 북서부의 하이티엔쿠(海澱區) 일대를 첨단과학기술원구(科學技術園區)로 지정했다.
중관춘 과기원구는 이 지역의 ▦하이티엔유엔(海澱園) ▦창핑유엔(昌平園) ▦?지쳉(電子城) 과기원 ▦펑타이유엔(豊台園) ▦이주앙(亦庄) 과기원의 5개 구역(계획 면적 367.5㎢)을 포괄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자상가, 과학촌, 정보산업단지 등으로 구성된 하이티엔유엔(340㎢)이 노른 자위다.
선진국에 비해 IT 단지 조성이 늦었던 중국 당국은 우선 '실리콘 밸리'를 모범으로 삼았다. 정부가 주도권을 갖고 개발한 일본의 쓰쿠바(筑波) 방식은 검토끝에 "별로 성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중관춘 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인재들이 자연스레 모여 단지의 모습을 갖추고, 정부는 그런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실리콘 밸리 방식이 여건에 맞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직접 지원보다 ▦도로망 개선 ▦거주지 조성 ▦행정 서비스 강화 등 측면 지원에 주력하는 모습에는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를 건너뛰어보려는 속셈이 깔려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중관춘 입주기업은 8,000여개. 이 가운데 70% 이상이 IT 관련 업체며 외국 투자 기업도 1,600개에 이른다. 매출은 99년 864억 위안(13조 5,500억원)이던 것이 지난해에 1,540억 위안(24조 1,500억원)으로 1년만에 100% 가까이 늘었다.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는 비율은 높지 않지만 벤처 기업들은 하루 평균 6개 이상 생겨나고 있다. '닷컴' 기업 중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포털인 신냥(新浪), 소후(搜狐), 왕이(網易) 등도 모두 이 곳에 있다.
최대 강점은 연구 인력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전통 깊은 베이징대, 중국의 기술관료 배출 창구인 이공 계열 중심의 칭화(淸華)대를 비롯해 런민(人民)대, 베이징 이공대, 과학기술대, 지질대, 의과대, 북경교통대 등 73개 대학이 몰려 있다.
중국과학원을 비롯한 정부의 232개 연구 기관 인력까지 더하면 과학기술 종사자만 24만명이 넘어 'IT인해전술'이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외국 기업이 보는 눈도 같다. 마이크로소프트, IBM, 인텔, 모토로라, 휴렛패커드, 미쓰비시 등 유명 다국적 기업들의 연구개발센터 48개가 이 곳에 몰려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중국 유학파가 창업 1순위로 꼽는 곳도 바로 여기다.
중관춘 개발을 책임진 류지화(劉志華) 베이징 부시장은 "중관춘은 젊은 과학기술 인력들이 넘치는 21세기 중국의 발전소"라고 말했다.
베이징=김범수기자 bskim@hk.co.kr
■중국형 '산학협동기업' 눈길
중관춘에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회사들이 있다. 교육기관인 대학이 인력을 직접 활용해 기업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중국형 '산학협동기업'이다.
국영 위주인 사회주의 체제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런 협동기업은 처음주터 대학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군(軍)도 1990년대 들어 활발하게 기업 운영에 손을 댔지만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아 99년 군의 사업 참여가 전면 금지됐다.
반면 인력 확보가 수월한 대학관련 기업들은 계속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영 연구소인 중국과학원 계열 기업 롄샹(聯想), 베이징대 계열 베이다팡정(北大方井) 그룹, 칭화(淸華)대의 칭화동팡(淸華東方) 등이다.
중국 컴퓨터 시장의 30%를 점유하고 있는 컴퓨터 완제품 생산업체 롄상은 지난해 매출이 3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 시장 점유율 1위다.
롄상에 이어 중국 2위의 컴퓨터 메이커인 베이다팡정 그룹은 지난해 80만 대의 컴퓨터를 생산한 데 이어 올해는 160만 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칭화동팡은 네트워크 보안, 인터넷 교육, 정보처리 기술 등 인터넷 관련 선두 기업이다. 세 회사 모두 핵심 인력 대부분이 20, 30대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이다팡정 그룹 순홍유 부총경리 인터뷰
"IT 사업의 성패는 기술인력 확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관춘은 세계 어느 곳보다도 유리합니다."
베이다팡정(北大方井) 그룹 계열 팡정?나오(方井電腦)의 순홍유(孫紅雨ㆍ34) 컴퓨터 부품 구매담당 부총경리(부사장)는 대학과 연구소가 몰려 있는 중관춘을 IT 사업의 최적지로 꼽았다. 수도이기 때문에 국가기관 납품ㆍ계약에 유리한 점도 IT 업체들이 이유라고 그는 말했다.
베이다팡정 그룹은 1986년 베이징대가 40만 위안(6,300만원)을 투자해 설립한 베이다신기술공사가 모기업. 컴퓨터 출판을 위한 하드ㆍ소프트웨어 개발로 시작해 95년부터 컴퓨터 제조에 눈을 돌렸다. 첫 해 3,000대 생산 규모가 6년만인 지난해 260배로 불어났다.
최대 주주는 여전히 창업 주체인 베이징대. 지금도 주요 임원을 대학측에서 임명하고 있다. "베이징대가 공급하는 고급 인력이 회사 발전의 기틀"이라는 孫 부총경리는 앞으로 인터넷 비즈니스 쪽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칭화동팡 예밍 부총경리 인터뷰
"1, 2년 전만 해도 중국 고급 인력들의 해외 유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제 중관춘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인터넷 관련 종합 서비스 회사인 칭화동팡(淸華東方)의 예밍(葉銘ㆍ28) 기획부 부총경리(부부장)는 올들어 중관춘이 어느 때보다 활력에 넘친다고 말했다. 직원의 평균 연령이 30세 전후인 칭화동팡 같은 인터넷 기업의 창업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칭화대의 투자로 설립돼 상하이(上海) 증시에 상장된 칭화동팡은 해마다 100%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는 32억 위안(5,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올해 목표는 60억 위안(9,360억원). 인터넷 보안과 정보처리 등 기초 사업을 강화하면서 사업 분야를 넓혀갈 계획이다.
2,500여 직원 가운데에는 칭화대 출신이 50%를 차지한다. 학연을 따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룽지(朱鎔基) 총리와 차기 당 총서기로 거론되는 후진타오(胡錦濤) 부주석이 나온 중국 제일의 이공대학인 칭화대의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