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개혁의 수위를 둘러싸고 정부와 재계가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여야 정치권의 재벌정책에 대한 태도가 지나치게 내년 대선 등 표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한나라당은 아예 재벌 규제완화를 당론으로 정해 기업의 불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다. 민주당은 규제완화 불가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나 개혁의 정도와 대선전략 사이에서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일각에서는 재벌의 규제완화 주장을 정권의 레임덕현상과 연결시켜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한나라당 김기배 사무총장은 15일 "외국은 공장부지를 거저 줘가며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며 "경기 활성화와 실업해소를 위해 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급변하는 경제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내 경제통인 이한구 의원도 "재벌, 즉 대기업 집단 자체를 나쁜 개념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재벌에 대한 인식전환을 촉구했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IMF 외환위기 직후와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으므로 재벌에 대한 규제도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가 재벌옹호론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재벌 규제완화 공방을 처음 제기한 김만제 정책위의장은 이를 의식한 듯 "낡은 규제정책은 폐기하되 3세, 4세까지 이어지는 부(富)의 상속을 막는 장치를 마련하는 등 기업들이 뒤에서 장난치는 것을 막자는 게 우리의 주장"이라며 "정부 여당이 우리의 주장을 친 재벌정책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이날 긴급 당정회의를 갖고 출자총액 25% 제한 등 재벌에 대한 개혁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했다. 이해찬 정책위의장은 "재벌들이 정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계열사를 80여 개나 늘이는 등 문어발식 경영을 하고 있다"며 "재벌 지배구조 개혁에 역행하는 일은 수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민주당은 그러나 '재벌 정책에 후퇴는 없다'는 원칙 고수가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는 있으나, 지나치게 재계와 등을 질 경우 부담이 크다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타당한 사업에는 (출자총액 제한의) 예외가 있을 수 있다"(이 해찬 의장), "해운 항만 등 업종에 대해선 부채비율 200% 제한을 탄력적으로 적용하겠다"(강운태 제2정조위원장) 등에서 수위 조절에 고심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민주당의 고민은 최근 당내에서 제기돼 논란을 빚었던 '개혁 피로증' '개혁 마무리론' 등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 자민련 민국당 등 정체성이 다른 정당과의 '정책 연합'이 가져올 불가피한 마찰을 감안하면 민주당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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