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의 턱밑에 와있는 나로서는 살아온 역정이 가끔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령왕릉 발굴이다.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지금까지 고고학과 관련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과연 행운이냐, 불운이냐 아직까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고고학이란 기록이 없는 시기에 우리의 머나먼 조상이 남겨놓은 흔적을 찾아 이를 분석, 연구해서 당시의 문화를 복원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상들이 남겨둔 흔적을 찾기 위해 발굴을 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발굴학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올해가 공주 송산리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 발굴조사가 이뤄진 지 만 30년이 되는 해이다.
1971년 7월 무덤의 널길 앞에 쌓여있는 전축분의 폐쇄전을 들어내고 나서 제일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김원룡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었다.
두 사람은 무덤 안에서 나와 흥분을 가누지 못한 채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제25대 무령왕임을 언론과 주위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었다.
이 무덤은 옆에 있던 송산리 6호 고분의 배수로 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 언론인과 관계자들이 동행했던 것이다.
두 분의 확인 후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왕릉이 발견되기는 우리나라에서 광복 후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내부를 보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의 욕심이 앞섰다.
조사 요원으로 참가한 나는 본격적인 내부 조사를 위해 가장 먼저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다. 무덤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눈앞에 처음보는 돌 짐승이 버티고 서있었다.
정수리에는 커다란 닭벼슬 모양의 장식이 박혀있고 얼굴 입술에는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붉은 칠을 한 모습으로 왕과 왕비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도 이 돌짐승이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상상의 동물이 분명했다. 이후 하룻밤 사이에 발굴조사가 완료됐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어서 발굴을 하자며 재촉했고 조사요원 또한 덩달아 그렇게 했다.
지금 같으면 유물의 위치나 방향 등을 꼼꼼이 살피고 훗날 복원까지도 할 수 있도록 몇 년에 걸쳐 조심스레 이뤄져야할 발굴이었으나 그렇게 끝냈으니 사상 최악의 발굴이 됐고 왕릉이 갖고 있는 학술 정보도 모두 놓친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앞서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후 그런 전철을 밟지않기 위해 발굴조사를 할 때마다 그날의 일을 교훈으로 삼고있다.
조유전·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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