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5월14일 대만 타이중(臺中)시 다이쇼조(大正町) 도서관 앞에서 23세의 조선 청년 조명하(趙明河)가 일왕(日王)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 일본군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에게 독검을 던졌다.대만 주둔 일본군의 특별 검열사 자격으로 대만을 방문한 구니노미야는 이 날 타이중의 일본군 부대를 검열한 뒤, 무개차를 타고 타이베이(臺北)로 막 출발한 참이었다. 조명하의 독검은 구니노미야의 왼쪽 어깨와 목을 스쳤다.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일본 당국의 보도 통제로 조명하의 의거는 한 달 뒤에야 신문에 공개됐지만, 이 사건으로 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가 사직했다. 구니노미야는 현장에서 죽음은 모면했으나 그 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사망했다.
조 의사는 황해도 송화군 태생이다. 1926년의 6ㆍ10 만세 의거 뒤 민족의식에 눈을 뜬 그는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가는 길에 대만에 들러 머물고 있었다.
그 곳에서 구니노미야의 대만 방문 소식을 듣고 거사를 결심한 그는 73년 전 오늘 이를 실행에 옮겼다. 조 의사는 그 해 7월 대만 고등법원에서 황족위해죄(皇族危害罪)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10일 순국했다.
1945년 민족 해방의 가장 큰 동력은 제2차세계 대전에서의 연합국의 승리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해방을 향한 민족적 열망과 그 열망을 최일선에서 구현한 여러 선열들이 있었다.
그들이 자기희생적 실천으로 노현(露顯)한 그 열망이 없었다면, 우리의 해방은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 순응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른 이들이 있었다. 역사를 잊은 이에게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 박정희 기념관이 세워져서는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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