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었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두고 온 아들을 생각했습니다."김순희(37)씨가 북한을 탈출,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기까지 7년간의 목숨 건 행로는 그 자체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였다.
샌디에이고의 엘 센트로 구치소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첫 밤을 보낸 김씨는 9일(현지시간) 환한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으나 그동안 겪은 온갖 고초를 더듬을 땐 연신 눈물을 훔쳐댔다.
함경북도 철산 태생으로 청진대 사범학교를 거쳐 무산에서 소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씨는 중학교 교사인 남편과 가정불화로 이미 헤어질 것을 결심한 상태였다. 마침 식량난까지 겹쳐 정기 급식은 고사하고 옥수수마저 구할 수 없게 돼 허기진 배를 채울 길이 없었다.
김씨의 월급은 쌀 2가마 가량을 겨우 살 수 있는 900원. 남편의 수입도 비슷했지만 먹고 살 수가 없었다.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었기 때문.
김씨는 마침내 탈출을 결심, '자유의 나라'로 알음알음 전해들었던 미국을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 탈출은 결심한지 3일만에 이루어졌다.
겨우내 압록강을 덮었던 두꺼운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94년 2월 말.
평소 탈북 경로를 알아뒀던 김씨는 두살배기 아들을 안고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경비원의 감시가 소홀한 한밤중을 택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만 경비원에게 발각돼 총격이 가해졌고 함께 국경을 넘던 2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아무런 연고가 없는 중국 옌볜(延邊)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더욱이 중국 공안요원과 재중동포 사회에서 암약하는 북한 비밀기관원의 눈을 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씨는 영구눈썹 수술까지 받아가며 철저하게 재중동포로 위장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현지 재중동포들은 김씨 모자에게 바느질거리를 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도 모자라 생선 장수로 나선 김씨는 빠듯한 생활비 일부를 밀입국 경비로 차곡차곡 모으면서 미국행 각오를 다졌다.
6년여간을 옌볜에서 보내는 동안 김씨는 미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탐문하기 시작했고 위조여권의 구입경로도 알아냈다. 지난해 10월 초 한국 국적의 한 남성으로부터 대한민국 여권을 2,000달러에 구입한 뒤 10월말 홍콩과 국경이 맞닿은 선전(深 土+川))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2년뒤에 꼭 돌아오마"라며 아들을 다독거렸지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은 어쩔 수 없었다. 김씨는 탈주에 필요한 7,000달러를 재중동포에게 빌리면서 아들을 사실상 '볼모'로 맡겨야 했다.
위조 여권으로 홍콩, 필리핀, 멕시코를 무사히 통과한 김씨는 멕시코에서 또다른 위조여권을 구입했으나 결국 이것이 발각돼 구치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필리핀과 멕시코에서도 현지 한인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지난해 12월부터 멕시코 티화나에서 머무르는 2개월 동안 생활비 조달을 위해 한인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일단 몸이 풀려나 일단 '반(半)자유'를 얻은 김씨는 "아들에게 '내년에 꼭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앞으로 처지가 어떻게 될지."라며 한숨을 지었다.
/샌디에이고=황성락 구성훈기자
■ 美교포들 "김순희 정착돕자" 모금운동
탈북 여성 김순희(37)씨 소식이 알려지자 LA 한인회 등은 9일(현지시간) 김씨 망명신청을 적극 지원키로 하고 모금운동을 펴는 등 미 한인사회 전체가 발벗고 나섰다.
한인사회는 김씨 망명 신청을 단순한 밀입국 차원이 아닌 북한을 탈출, 인권과 자유를 찾아 나선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재미 남가주이북도민회 연합회 최 철 회장은 "김씨의 휴먼스토리를 듣고 많은 도민회 회원이 놀라면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어떤 형태로 입국했건 우리 동포인 만큼 한인사회가 김씨의 망명과 미국 정착을 도와주자"고 호소했다.
LA한인회 하기환 회장도 "샌디에이고 한인회 등 여러 한인 단체와 함께 김씨의 망명이 허가되도록 미국과 한국 정부의 지원을 적극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에 머물고 있는 김씨의 아들도 김씨와 함께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미국과 한국 정부가 도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김씨는 한인회와 미 인권단체 등의 도움으로 15일께 정식 망명을 신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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