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말 전국의 약국들은 비타민C 사재기 소동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일부 대형 약국에는 주문 양이 평소의 20~30배나 됐고, 박스 단위로 사재기하려는 고객들로 10분 만에 재고가 바닥나기도 했다.모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 이왕재 교수가 "비타민C는 고혈압, 중풍, 심장병 등 여러 질병에 효능이 있다"고 말한 다음 날 벌어진 현상이다.
K제약사 관계자는 "당시 이틀 동안 한 달치 물량이 동났다. 요즘도 예년보다 서너 배 이상 팔리고 있다"며 광적인 비타민 파동에 쾌재를 불렀다.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1980년대 말 '뉴스타트 운동'을 주창한 이상구 박사가 "채식 위주의 식생활로 각종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한 직후 문을 닫는 고깃집이 속출했다.
10년 후 상황은 역전됐다. 고기만 먹고 살을 뺀다는 '황제 다이어트'가 유행하면서 고깃집마다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드라마 '허준'에서 매실이 좋다고 하자 너도 나도 매실을 찾아 때 아닌 품귀현상을 빚은 일도 유명하다.
물론 이유는 있다. 우리나라 중년 세대, 특히 40대 남성의 사망률은 세계적으로 높다.
일반적으로 40대 사망률은 30대의 2배, 50대는 4배로 급증한다. 한창 일할 나이의 형제나 친구가 갑자기 암이나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는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일이 아니구나'하는 공포감에 자신의 건강을 되돌아 보게 된다.
회사원 박모(41)씨는 "며칠 전 고교 동창회에서 한 친구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당장 암 보험에 가입하고 종합검진도 예약했다"고 토로했다.
한국인의 건강 과민은 종합검진 열풍에서도 드러난다. 전체 검진 비용이 100만 원이나 되는 S병원 종합검진의 경우 연말까지 예약이 밀려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환자가 몰리자 병원마다 40만~50만 원 이상의 종합검진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만들었는데도 두세 달 이상 기다려야 검진이 가능할 정도로 환자가 폭주한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닥터쇼핑'을 하는 건강염려증 환자도 많다. 직장여성 이모(25)씨는 신문이나 TV에서 '요즘 무슨 병이 유행한다'라는 기사만 나와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없다.
다음 날이면 반드시 해당 전문의를 찾아 검진을 받고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어야 안심을 한다. 주변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불안해져 꼭 검사를 받는다. 이씨는 "신문이나 TV의 건강기사를 보기가 두렵다"며 "한 달에 두세 번은 의사를 만나야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이씨와 같은 건강염려증 환자는 의외로 많다. 단국대 간호학과 오진주 교수팀이 1997년 말 전국의 20대 이상 남녀 409명을 조사한 결과 20ㆍ30대는 60%, 40ㆍ50대 80%, 60대 이상 67%가 건강염려증 환자로 조사됐다.
실제로 대학병원 종합검진센터에는 특별한 신체 이상이 없는데도 증상의 심각함을 호소하는 건강염려증, 건강공포증 환자들로 만원이다.
오 교수는 "한국의 중년층은 건강이 나빠지면 생활이 단절되고 이로 인해 자신이 해 온 역할을 다하지 못할까 봐 위기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서울중앙병원 정신과 주연호 교수는 "유전자 변형 음식에 대한 걱정, 광우병이나 구제역 등에 대한 불안, 휴대전화가 뇌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보고 등이 현대인을 건강에 집착하게 만들고 있다"며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자연요법, 건강산업도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자극하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의료계 일각에선 경영위기에 처한 의사들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대중매체에 편승해 무분별한 의료상업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몸에 좋다면... 영양제 등 남용 심각
워낙 헐벗고 굶주렸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약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단국대 오진주 교수팀이 6개월 간 한약, 보약, 영양제, 건강보조식품 등을 복용한 사람의 비율을 1997년 말 조사한 결과 20ㆍ30대 30%, 40ㆍ50대 45%, 60대 이상 54%로 나타났다.
LG애드가 지난 해 6월 서울 지역 35~54세 성인 300명을 조사한 결과, 주로 먹는 보약류는 영양제 20.5%, 인삼 17.5%, 꿀 16.4%, 한약 11.6%, 홍삼 6.1%, 영지버섯 6.1% 등의 순이었다.
문제는 건강에 좋다고만 하면 전문가의 도움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남용하는 데 있다. 건국대 가정관리학과가 1997년 60세 이상 노인 450명을 조사했다. 45%가 비타민과 미네랄 영양제를 과잉 섭취하고 있으며, 비타민류를 권장량의 63배까지 복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조사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해 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건강보조식품을 먹은 후 '효과를 보았다'는 경우는 22.0%에 불과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품질이나 부작용에 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시중에 불법 유통되는 제품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서홍관 교수는 "모든 질병에 효과가 있는 만병통치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며 "종합검진이나 특정 약품에 의존하기 보다는 흡연과 폭식, 폭음, 과로, 스트레스 등 나쁜 생활습관을 교정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 생활습관만 교정해도 평균 수명이 7년 이상 연장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약으로 건강을 지키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고 말했다.
고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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