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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기획 /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한명숙 여성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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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기획 /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한명숙 여성장관

입력
2001.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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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5월에 푸르디 푸른 사랑하는 당신, 그리고 아들 길에게참으로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 형식의 글을 써보려고 책상머리에 앉았다오. 그런 내게 문득 떠오른 물음 하나 있어 내 마음을 꼬옥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구려.

"일하는 여성에게 가정이란 짐일까 힘일까?"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 무엇일 지는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아시지요?

한 평생 가정보다는 사회를 향해 줄달음쳐온 나이지만, 가정은 언제나 변함 없이 내 삶의 소중한 중심이라는 것, 이 또한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더 먼저 알고 계시죠?

돌이켜보면, 우리의 가정생활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시작된 당신의 옥살이와 나의 옥바라지를 기점으로 본 궤도에 진입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당신은 그때 나에게 연인이자 동지였으며 동시에 가정의 대들보였습니다.

당신이 긴 옥살이를 하는 동안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갔고 한 주일에 한 번의 편지 쓰기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소중한 우리의 가정을 지켜왔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요.

붉은 검열 도장이 꽝꽝 찍힌 편지들.. 그 안에 촘촘히 박힌 정성들인 글씨들.. 그들을 매개로 우리는 인생과 신앙을 이야기했고 역사와 사회를 논했으며, 심지어는 여성문제에 관한 세미나마저 했지요.

우리가 주고받은 그 수많은 편지는 감옥의 높은 콘크리트 담을 넘나들며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우리 가정을 지켜준 질긴 동아줄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삶을 지탱했고 우리의 소중한 가정을 보듬어 안았습니다.

13년 반 만에 당신이 출옥했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보통 남녀와 똑같이 결혼생활을 계속했고, 나이 마흔이 넘어 아이를 얻었지요. 아이를 업고 걸으며, "고목에 새 순 같이"라고 했던 당신의 표현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어요.

늙은 고목 같은 당신과 내가 정말 새순 같은 아이를 낳은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때부터였습니다. 아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던 것은 말입니다.

가사노동과 육아문제를 놓고 당신과 나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기 시작했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긴장관계의 기나긴 터널 속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길이가 태어난 1985년, 나는 늦깎이로 대학원을 졸업한 후 곧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는데, 어느덧 세 살이 된 길이는, 아침이면 "엄마 나 오늘은 어디다 맡길 거야?"라고 묻곤 했지요.

길이의 물음은 가슴을 후비는 아픔이었고 그래서 나는 하마터면 사회활동을 포기할 뻔했었지요.

그럴 때마다 주저앉으려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것은 당신, 당신의 큰 사랑과 믿음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10년도 더 되는 기나긴 갈등과 고뇌를 딛고, 우린 드디어 '함께 일하는 가정'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오늘 우리는 각자가 하는 역할과 일을 존중하고 집안 일은 자연스럽게 나누어 하며 서로 격려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좋은 부부'가 되었다고 여러 사람 앞에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순간에도, "일하는 여성에게 가정이란 짐일까 힘일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을 맴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 우리 가정은 역시 가장 든든한 힘이라고 확신하고 있답니다.

韓 明 淑 여성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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