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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칼럼] 속이 뒤틀리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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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칼럼] 속이 뒤틀리는 말

입력
200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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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다 보면 마음에 걸리는 말들을 맞닥뜨릴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 .지난 번 칼럼 "거슬리는 말"의 글 머리를 이렇게 썼더니, 닮은 서두의 편지가 왔다.

"신문을 읽다 보면 속이 뒤틀리는 말을 맞닥뜨릴 때가 자주 있다. 예를 들면-."

지난 번 칼럼은 "거슬리는 말"의 예로 '원조교제'등을 들고, 우리 언어 생활에 스며 든 일본오염(日本汚染)을 걱정한 것이었으나, 그 독자의 편지는, 요즘 흔한 '대권(大權)'이란 말의, 더욱 심각한 일본오염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편지는 대권이란 말이 쓰인 보기로 "DJ, 대권경쟁에 일침"이란 표제의 기사(한국일보3월17일자)를 들었다.

기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여당의 최고위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모아 놓고, 이른 바 대권주자(走者)들이 지방을 나돌면서 "대권만 갖고 얘기하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한 당부를 인용하고 있다.

이를 놓고 편지 쓴 이는 이렇게 꼬집는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청와대에서까지 대권이란 말이 나옵니까. 대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정치하는 사람, 신문 만드는 사람 모두 말을 가려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대권은 원래 천자(天子)의 권병(權柄), 황제의 통치권을 이른다. 그러니까 중국 원전(原典)에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일본 메이저헌법(明治憲法)에 쓰이면서, 그 뜻이 달라진다. 그 뜻을 일본 사전은 이렇게 풀이 하고 있다.

"메이저헌법에서 헌법상의 기관(註=議會ㆍ內閣 등)의 참여에 의하지 않고 정무를 친재(親裁)하는 천황의 권력을 이름."

신성불가침이라던 천황의 절대권력이 '대권'인 것이다.

당연히 일본의 새 헌법은 대권이란 말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절대왕조(絶對王朝)시대 유럽에서 쓰이던 royal prerogative(君主特權), 중국 원전의 大權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 것도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오늘 이 땅에서 대권이란 말이 판을 치는 까닭이 무엇일까.

부르봉 왕조를 닮았다던 국부(國父) 이승만 시대에도 쓰이지 않던 말이, 왜 지금 나올까. 우리 정치 시계는 거꾸로 도는 것일까.

분명 말은 현실을 반영한다. 대권이란 말의 성행 속에 우리 정치의 오늘이 잘 드러나 있다.

여권 일각에서도 제기했던 제왕적(帝王的) 대통령 비판이 그 일단을 함축한다.

헌법제도야 어떻든, 우리 대통령은 사실상의 대권자나 다름이 없다. 그 그림자가 정당 정치, 의회정치를 무색케 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이 사람의 생각을 규제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대권이란 말로서 우리는 대통령=대권자의 도식을 기정사실화한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이런 생각에 순치가 된다면, 제왕적 대통령의 초법적 대권을 비판하고 견제할 기능마저 마비가 된다.

이른 바 대권주자들은 이를 당연시 하고 그 '대권'에 의한 책립(冊立)을 기다린다. 책립이란 바로 조칙(詔勅)에 의하여 태자를 세움을 이른다. 참으로 왕조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국민들을 정말 지겹게 하는 것은 그 대권이란 말만은 아니다. 말이야 대선(大選).

또는 차기(次期) 등으로 바꿔 부를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판 모양새를 보거나, 앞으로 1년10개월이나 남은 세월 동안 내내 용(龍) 타령을 들을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진저리가 날 지경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정치권의 헤아림은 찾아 보기가 어렵다. 그제 긴급소집된 민주당의 최고위원 워크숍에서는 지방 재ㆍ보선 결과에 대한 자성론(自省論)이 무성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신문을 살펴도 너무 일렀던 용 타령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여권3당의 선거협조를 다짐했던 면면들의 호화 골프 모임 사건이 화려하다.

'속이 뒤틀린다'고 했던 독자의 편지 사연이 별로 지나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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