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의 저서 ‘히로히토와 근대 일본 만들기’가 금년도 퓰리처상을 받았다.이 책이 나오기 오래 전부터 나는 일본의 동료학자들로부터 히로히토가 제국주의 군부에 휘둘린 허수아비가 아니라 진주만 공격을 ‘진두지휘한’ 군부의 총수였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빅스 교수에 따르면 맥아더가 히로히토에게 안겨준 면죄부가 그와 공범이었던 일본인 전체에게도 죄를 피해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일본 교과서 역사왜곡 문제와 이 책의 퓰리처 수상의 타이밍은 참으로 절묘하다. 하지만 절묘한 타이밍은 그뿐 만이 아니다.
얼마 전 일본 고고학계를 뒤흔든 유물조작 사건은 또 어떤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일본학자들조차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한 연구결과이긴 하지만, 막상 터지고 나니 일본으로선 참으로 뼈아픈 일이었다.
은근히 그 역사가 사실이길 바랐던 많은 일본인들은 모든 문물이 대륙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일본이 예전부터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임을 자랑할 수 있는 증거를 잃은 셈이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 일본에서 대륙으로 문화가 전파되었노라고 말하려든 참이었는데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두 사건의 타이밍이 범상치 않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일본을 도울 수 없다. 섬생물지리학(island biogeography)이라는 진화생태학 분야가 있다. 섬의 생태계는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생물들에 의해 시작되고 변화한다는 이론이다.
육지에서 가까운 섬일수록 그리고 면적이 넓은 섬일수록 높은 생물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어느 적절한 시기에 어떤 생물이 육지로부터 이주하여 정착하는가에 따라 그 섬 생태계의 역사가 정해진다. 섬나라의 생물상과 문화가 별나게 독특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섬생물지리학에서는 아무도 섬으로부터 육지로 이동하는 생물을 말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너무나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생물이든 문화든 대륙에서 반도를 거쳐 섬으로 가게 마련이다. 이처럼 일본의 열등의식은 그 뿌리가 깊다.
근대사적인 뿌리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나라는 외래문물을 받아들이거나 해외로 진출하는 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영국의 해외 진출이 그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또 그랬다.
대학 시절 일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 변이를 조사하러 온 생물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아직 한일 협력이 그리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라 우리로서는 그와의 만남이 여러 면에서 매우 소중했다.
많은 걸 배우려는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폭탄주를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그는 일본 왕족이 한국인이라는 폭탄선언을 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일왕과 그의 가족들의 다리를 본 적이 있는데 털이 별로 없더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아이누족의 피 덕택에 우리보다 훨씬 수북한 털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일본 학자들에게 들은 사실인데 일본 왕족이 자신들이 한국인이라는 과학적 증거를 확보한 지 오래지만 차마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역시 퓰리처상에 빛나는 저서 ‘총, 균, 쇠’의 저자이자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독립적으로 비슷한 증거들을 수집하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왜 이 같은 본격적인 연구결과가 우리 학자의 손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일까.
‘한국인에게 일본은 무엇인가’를 저술한 일본 도쿄도립대학 정대균 교수에 따르면 아직도 ‘멸시와 동경’ ‘자조와 자존’의 극단적인 이분법의 단계를 넘지 못한 우리의 편협함 때문이다.
일본은 우릴 36년 동안이나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고 지금도 손바닥 위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는데 우린 일본을 너무 모른다. 반일 감정이 탐구를 방해해왔다.
우리 대학들엔 아직 일본학과조차 변변히 없다. 상대를 알아야 싸움을 하든 사랑을 하든 할 것이 아닌가.
교과서 왜곡은 역사유물 조작으로 궁지에 몰린 쥐가 드러낸 이빨에 불과하다. 막다른 골목의 쥐 앞에서 구호와 항의가 웬 말인가.
그런 쥐굴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인 우리 국회의원의 모습이 의연하기보다는 왠지 처연하다고 느낀 이는 나만이 아닌 듯 싶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드디어 우리나라가 안중근, 김구 등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무식한 독립운동가들이 판치는 나라라며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어느 고등학생이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극치를 이룬다.
일본 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관계로 나는 일본에 자주 가는 편이다. 그런데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일본 사람들이 사는 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한 때 세계 제2의 강대국을 넘보던 그들이지만 왜 그렇게 궁상스럽게 사는지 모르겠다. 지금 그 일본이 끝 모를 추락의 길로 들어섰다.
머지않아 자연스레 중국과 미국사이의 작은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긴 마찬가지였지만 독일과 일본의 운명은 철저한 자기분석의 차이에서 확연히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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