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 밖. 따사로운 봄볕이 온돌같이 뜨시고, 묵은 옷을 벗어버린 나무와 살랑거리는 바람이 더없이 살갑다.그 뒤로 드문드문 노인네들이 소일 삼아 일궈 놓은 산비탈 밭이 보인다. ???안에서 어쩌면 고즈넉하게 보일 만큼 한가롭게 일하는 모양이 빙그레 미소를 띠게 하고, 절로 우리들을 과거 속으로 이끈다.
어린 시절, 이런 봄날이면 쑥 개떡 한 입을 먹고 노란 봄볕속을 뛰어 다녔다.
미끈거리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뛰어 다니면 부옇게 일어났던 시골길 먼지.너나 할 것 없이 머리에는 곰발이 덕지덕지 붙고, 불이라도 닿으면 너무나도 쉽게 구멍이 뚫렸던, 때절은 태피터 잠바를 입은 모습들.
코를 흘리며 또는 훌쩍이며 봄 햇살이 스팀처럼 닿는 돌담길 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여있으면 겨우내 감지 않은 머리로부터 가만가만 기어 내려오는 이. 우리들은 그 광경을 보고 큰 소리로 웃거나 그 아이를 놀려댔지만 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청년 시절이 찾아 왔다. 아이는 제법 어른스런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궁휼함은 변하지 않았다. 대학이라는 괴물을 만나 좌절한 그 해 봄은 길었다.
말메뚱(馬墓)에서의 취로사업으로 막걸리를 뱃속에 채웠다.전표 20장, 하루 20차의 흙을 퍼 나르는 것으로 일과를 마치면 오거리를 떠돌았다.
누구나 마찬가지였지만 대학을 가지 못한 좌절감은 때로는 몸을 떨게 했다. 그 끝에 찾아 든 군 생활도 낮은 포복을 할 때면 팔 다리에 상처를 입혔던 땅가시 같았다.
20대는 그렇게 상처투성이로 힘겹게 끝이 났다.
50대를 바라보는 40대의 마지막 몇 년. 거친 들판을 달려온 스라소니의 형용도 어느덧 저물고 이제는 그냥 생명을 이어가는 허기만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 하다.
푸른 젊음도 거두고, 사랑도 거두고, 마침내 열정까지도 거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삐비꽃 피는 봄날이 찾아 왔다. 그리고 봄이 계속 오는 한 우리들의 꿈은 이어진다. 비록 젊음과 사랑이 떠났다고 해도 우리들이 이뤄야 할 소망은 아직 간절하다.
마치 감물들인 은은한 옷 색깔 같이 우리가 취해야 할 정결한 가치가 남아 있다. 그것을 위해 우리들을 곧추 세워야 한다.
우리안에 강철같은 신념과 하늘을 나는 이상은 없을지라도 이 봄 같은 소망은 남아 있기에 짐짓 우리를 다독여야 한다. 봄이 왔다.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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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혁·전남 목포시 용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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